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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雄이면서 詩人이면 무서운 사람이니…
英雄이면서 詩人이면 무서운 사람이니…
  • 이중 前 숭실대 총장
  • 승인 2006.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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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중국산책 (8) 시를 쓰는 중국 지도자들

▲모택동의 친필시 '장정'. 1934년부터 35년 10월 사이, 중국 노농홍군의 주력군은 江西, 福建 근거지로부터 陝北 지방으로 진군, 11개의 성을 지나 적군의 포위 섬멸작전을 궤멸하며, 일만팔천 리를 계속 행군, 군사적, 정치적인 의미는 물론 자연의 숱한 험로를 헤치고 마침내 해방구에 이른 싸움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장정'은 이를 기념한 시다. ©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
장사의 호남 제1사범학교 시절, 모택동의 별명은 ‘時事通’이었다. 한국 나이 스무 살이 되어 사범학교 학생이 된 모택동은 세계지도와 영어사전, 그리고 메모를 위한 노트를 늘 끼고 다녔다고 한다. 7년 전 정월에 중국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를 찾으면서 나는 모택동의 모교인 호남 제1사범학교부터 먼저 둘렀다. 유럽풍의 인상을 주는 호남사범학교는 당시로서는 무척 개방적인 성격의 학교가 아니었던가 싶다. 다소 이국적인 정취를 풍기는 건물과 교정을 가진 모택동의 모교였다. 

학생들은 이방인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주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입구에 수위실 같은 것도 없고, 누구냐고 묻거나 출입을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다. 한국 학교의 엄격한 통제만 봐 오다가 막상 ‘공산 중국’에서 이런 체험을 하게 되니 이상했다. 무질서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무한대의 방임은 아닐 테고, 굳이 통제를 할 필요가 없는 넉넉함과 느슨함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학생 식당에서 마음대로 메뉴를 골라 점심도 사먹었다. 학생 하나가 자발적으로 이국의 손님을 맞아 주는 것이어서, 그 학생을 따라 넓은 교정을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학생은 그들의 자랑스러운 대 선배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시사통’이란 별명에, 유명한 ‘책벌레’였다는 이야기도 거기서 처음 들었다.

모택동이 시를 썼다고 하면 적지 않은 한국인들은 의아해 한다. 중국에선 당연한 상식인, 모택동의 시 쓰기가 한국에선 의외의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모택동뿐만 아니라, 주덕, 진의, 엽검영 등 중공당의 최정상 장군들이 시를 썼고, 시집도 냈다. 주덕이라면, ‘홍군의 아버지’로 통하는 야전군의 통수인데다, 별로 유식해 보이지도 않는 그가 시를 쓰다니, 이상하겠지만 사실이다. 그에게도 시집이 있다.

현재 내 수중에 있는 ‘陳毅詩詞選集’(인민문학출판사, 1977)만 해도, 3백50쪽에 1백50편의 시가 실려 있다. 진의 역시 주덕과 함께 정강산 시절부터 모택동의 동지이자 유명한 新四軍의 영도였다. 그는 주은래, 등소평과 함께 프랑스에서 고학을 한 이력이 있고, 고향 후배인 등소평과 특별히 친했다. 공산정권 초대 상해시장이었으며, 주은래로부터 외교부장 자리를 이어 받았다. 작년 북경에서 열렸던 북한 핵 문제 6자회담에서 중국의 대표가 자작시를 낭독하여 화제를 모은 적도 있지만, 중국에선 지도급 인사들이 시를 쓰는 일이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강택민도 가끔 자작시를 발표했다.

▲모택동은 두보와 이백을 좋아했지만 이백을 훨씬 추켜세웠다. ©

이런 저런 사정을 알게 되면, 호남사범 시절부터 楚辭를 공부하고 唐宋의 詩詞에 밝았던 모택동이 직접 시를 썼다는 것이 조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는 唐시인 중에서도 李白, 李賀, 李商隱의 三李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물론 두보의 시도 좋아했다. 두보에 대해서는, 이백과 묶어서 비교하기를 즐겼고, 자기 나름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는데, 두보보다는 이백을 추켜세웠다.

 
한국인들은 아무래도 정서상 두보 쪽에 가깝다. 어릴 때부터 교과서에서 ‘杜詩諺解’ 같은 걸 배웠고, 눈물과 恨 같은 것에 익숙한 탓일 것이다. 이백의 시는 호방하지만 과장이 심하다 하여 두보 쪽에 정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모택동은 바로 그런 이유로 하여 두보보다는 이백을 선호했다. 두보의 시는, 눈물이 많고, 소지주의 입장에 서 있으며, ‘정치시’라는 것이다. 모택동은 1958년의 성도 회의에서 두보의 시를 언급하면서 “杜甫的詩是政治詩”라고 말했다. 모처럼 성도에 가서는 두보초당에서 두보시집을 빌려 와서 실컷 읽으면서도 그런 평가를 내렸다.  

반면에 이백의 호방하고 반항적인 성격과 생애를 사랑했다. 시를 통해 왕과 제후를 비웃고, 세속을 멸시하고, 권위를 부정하고,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백의 기백을 모택동은 좋아했던 것 같다. 모택동 자신이 낭만적 기질을 갖고 있었다.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기질과 상통하는 이 낭만적 기질은 자기 자신도 인정했다. 고향 선배이자 은사이기도 한 黎錦熙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택동은 “원래 본성이 속박을 싫어합니다 … 애석하게도 저는 지나치게 감정이 풍부하여 너무 의분에 빠져 슬퍼하고 분개하는 병폐를 가지고 있습니다 … 쉽사리 감정에 휘말리기 때문에 엄격한 규칙생활에는 견디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시를 쓰면서 영웅인 자는 무서운 사람”이라는 陳舜臣의 말을 빌면, 모택동도 무서운 사람일 것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본적을 대만에 두고 활발하게 문필활동을 하는 진순신은 그의 ‘중국시인전’(서석인 옮김, 서울출판미디어)에서 曹操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웅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는 인물은 무섭다. 시란 원래 과잉된 감정이 분출된 것이지만, 영웅의 경우 그것은 말 밖으로 넘쳐 나와 버린다. 그 격정이 사람들이 사는 현실세계에 성난 파도처럼 밀려닥치면 곧이어 행동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늙은 천리마 마판에 엎드려 있어도 / 그의 뜻 천리에 뻗고 / 열사의 몸 비록 늙었어도 / 그 장한 뜻 어찌 버리랴(老驥伏? 志在千里 烈士暮年 壯心不已)

진순신은 조조의 대표시라 할 위의 시구를 들며 영웅과 시인을 겸한 인물의 무서움을 이야기했다. 진순신은 또, “나의 ‘秘本 삼국지’라는 작품은 조조를 주류로 보고 쓴 소설로, 이제까지의 삼국지 이야기와는 다소 다르다고 자부하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조조 팬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래도 조조의 이력 가운데는 쉽게 용납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고 쓰고 있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쉽게 용납할 수 없는 대목”이란, 권력과 결부된, 조조의 비정함과 냉철함, 또는 잔인함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조조의 영웅으로서의 무서움일 것이다.    

조조는 계산과 감정의 교차, 기복이 심했던 것 같다. 袁紹 진영에 있던 陳琳이란 격문의 대가가 있었다. 조조는 그를 포로로 잡아와서는 별나게 중용했을 뿐 아니라 자기 조상을 욕한 격문을 비싼 값으로 사들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감정과 계산이 마구 헷갈리는, 이러한 조조의 모순을, 그가 시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천하에 뜻을 두면 먼저 하는 일이 인재를 모으는 일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대권을 꿈꾸는 사람의 첫 번째 과제는 인재 풀의 형성이다. 옛날 周公은 사람이 찾아오면 입에 든 음식도 급하게 내 뱉으며 사람을 맞이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一飯三吐 一沐三捉이 그것이다. 한 끼 밥을 먹으면서도 세 번이나 밥알을 내뱉으며 사람들을 맞이했고, 목욕하다가도 세 번이나 머릿단을 움켜쥔 채로 사람들을 맞이하러 나갔다는 이야기다.    

조조의 유명한 시 ‘短歌行’에도 그런 시구가 나온다. 조조의 속마음일 것이다.

달은 밝고 별은 드문드문 / 까마귀 까치 남으로 날아가네 / 세 번이나 빙빙 나무를 돌지만 / 그래 어느 가지에 기댈까 / 산은 아무리 높아도 그만 / 바다도 깊을수록 좋은 것 / 주공은 먹던 음식조차 내뱉어 / 천하의 마음을 얻었다네(月明星稀 烏鵲南飛 繞樹三巾*      何枝可依 山不厭高 海不厭深 周公吐哺 天下歸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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