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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문화 (계간) : 겨울 [2022년]
황해문화 (계간) : 겨울 [2022년]
  • 최승우
  • 승인 2022.12.21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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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얼문화재단 편집부 | 새얼문화재단 | 400쪽

21세기 인간의 조건을 묻는다 4 - 전쟁, 폭력, 평화

이번 호 『황해문화』 특집은 ‘21세기 인간의 조건을 묻는다’ 네 번째 장기연속 기획으로, “전쟁, 폭력, 평화”를 주제로 하고 있다. 2021년 봄호에서 “불안전한 세계, 안전에 대한 욕망”, 2021년 가을호에서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 2022년 봄호에서 “기후위기 시대, 정의로운 전환은 가능한가”를 다뤘는데, 일 년 만에 ‘전쟁’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했다.

이 주제를 기획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올해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당초 예상과 달리 장기전으로 이어지면서 세계 정치·경제·군사안보 질서에 큰 영향을 끼치고, 동아시아 평화 전망도 급격하게 불투명해지고 있다.

북한의 무력 도발과 일본의 무장 강화는 물론이고 대만 문제도 직간접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일각의 우려는 간단히 흘려보낼 문제 제기가 아니다. 실제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인 2021년 11월, 백승욱 교수는 현대중국학회에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동시에 중국이 대만의 일부 섬을 점령하고자 나선다면, 한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국내에서 아무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현실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때, 그는 우크라이나와 대만 문제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여기에는 러시아와 중국의 통치 변화, 국제 질서에 대한 도전이 반영되어 있다고 경고했다.

그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성립된 얄타 체제라는 ‘전후 질서’ 수립자들의 내부 위기를 심각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신냉전’이라는 말로 담을 수 없는 사태인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시작된 현 사태가 전후 질서의 균열과 위기로 심화되면서 ‘포스트 얄타 체제’를 요청하게 될지, 그 정도는 아니고 ‘신냉전’이 본격화되는 계기로 작용해 세계가 두 개의 진영으로 다시 대결하는 사태로만 확산될지, 그도 아니면 공진성 교수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들」에서 논의한 것처럼, 우리는 늘 이미 전쟁 중이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다만 유럽에서 일어난 첫 번째 전쟁에 불과한 것이며 앞으로 제국의 경계에서 정체성 전쟁의 위험이 높아질 것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 것인지, 현재로선 앞으로의 전망을 가늠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황해문화』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전쟁, 폭력, 평화”를 특집으로 기획한 것은 이번 전쟁이 20세기 후반부터 주목받고 논의되었던 전쟁의 성격 변화라는 차원에서, 그리고 이를 폭력론과 새로운 평화론과 연결해 재고찰하면서 조망되고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쟁에 관한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전쟁은 국가들(특히 국민국가들) 사이에서 또는 그것에 준하는 집단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군사적 갈등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쟁 정의는 20세기 후반 이후, 특히 포스트 냉전과 세계화 시대에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국민국가들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졌고, 이에 따라 이른바 ‘전 지구적 내전’이 확산되었고, 국가에 의한 군사적 독점을 거스르는 비국가적 또는 비정부적 군사 조직들 사이의 갈등이나 ‘민족 청소’로 상징되는 민족적·종교적 갈등의 제노사이드화, 테러리즘 확산 등 이른바 ‘새로운 전쟁들’이 등장하면서, 전쟁에 대한 변형된 정의와 새로운 재고찰이 불가피해졌다.

전쟁에 대한 새로운 고찰은 폭력에 대한 재고찰과 분리될 수 없다. ‘새로운 전쟁들’의 전개는 전쟁 문제가 국가 간 폭력 문제로 한정되지 않으며, 구조적 폭력 및 ‘극단적 폭력’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포스트 냉전과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정치 공동체 내부의 폭력과 전쟁 사이의 구별 불가능성이라는 현상은 훨씬 더 심화되고 있다. 한편으로 전쟁은 대규모 전면전 형태를 띠기보다는 국지적인 지역 분쟁 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미국의 중동 전쟁은 첨단 군사 무기를 활용하여 적들에게 최대의 피해를 주되 아군에게는 최소의 피해, 실제로는 ‘사망자 제로’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여기에 맞선 아랍-이슬람 세력의 투쟁은 테러리즘 형태로 전개돼왔다.

다른 한편으로 선전포고로 시작되는 전통적인 형태의 전쟁은 아니지만, 사실상 전쟁과 다름없는 ‘내전’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형태의 폭력들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시리아를 비롯한 아랍-이슬람 지역과 아프리카 지역은 이러한 폭력 형태들이 만성적으로 그리고 연쇄적으로 되풀이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런데 만성화된 폭력들이 세계 체계의 주변부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적 불평등 심화나 여성 및 성소수자들에 대한 끊이지 않는 혐오, 차별과 폭력, 제도화된 인종(차별)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의 전개, 생태계 파괴와 환경 재난 등은 중심부 국가와 사회에서도 만성화된 형태로 전개되는 폭력들이다.

따라서 “집합적 폭력의 제도”로서 전쟁은 이러한 구조적이고 극단적인 폭력들을 양분 삼아 번성하면서 역으로 다시 이 폭력들을 심화하고 확산시키는 촉매로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폭력들을 우리는 어떻게 사고하고 개념화할 수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 폭력에 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쟁과 폭력 문제는 결국 평화 문제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유형의 전쟁들의 전개, 상이한 양상과 스케일로 확산되는 폭력과 갈등 및 분쟁은 평화 개념과 이론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요청하고 있다.

새로운 평화 개념은 한편으로 법적인 평화 개념, 전쟁의 부재로 정의되는 소극적 평화 개념을 뛰어넘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다양한 형태의 평화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모두 포괄하려고 하는 환원주의적·본질주의적 시도를 경계해야 한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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