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4:30 (금)
조련된 고릴라와 지식검색
조련된 고릴라와 지식검색
  • 임운택 계명대
  • 승인 2006.05.3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강의시간

임운택 / 계명대·사회학

아직 여러모로 신임 티가 짙게 배어있는 초보교수이지만, 그럭저럭 강의경력은 5년차에 접어들고 있다.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의 반을 흘려보냈으면 강의의 내공이 점차 깊어져야하는 것이 당연지사이거늘 수업을 마치고나오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교양과목 수업은 약간의 긴장을 풀어버리면 어수선해지기 십상이고, 주로 세미나식으로 진행하는 전공수업은 dialogue가 아닌 monologue가 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접해본 진지한 조언 중 하나는 강의는 철저하게 학생들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눈높이 조정이 강의의 질 향상에 놓여있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고객의 수준과 무료함을 고려하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게다가 가끔 신문에서 몇몇 대학에서 성공적(!)인 별난 강좌에 대한 기사를 읽게 되면 진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가 아닌,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 신경 좀 써야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억울한 생각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서 종종 내가 강의를 받던 시절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두 개의 대문자 R이 양립하던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나 또한 지금의 은사님들이 듣자면 거북한 소리가 될 터이나 일부 강의를 예외로 한다면 솔직히 지금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적 강의에 대한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이유는 매우 다르다. 당시에 의식화된 ‘오만과 편견’은 스스로 (그람시의 표현을 빌자면)‘조련된 고릴라’로 양성되기를 거부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지배적인’ 논리를 깨트리기 위한 ‘다른’ 논리탐구는 마치 퍼즐을 풀어가는 과정처럼 흥미롭기까지 하였다. 논리의 대결은 현실의 갑갑함을 풀어주는 청량제였고, 대학은 최소한 그처럼 자유로운 공기가 숨 쉴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시절에는 강의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없었지만  되돌아보건대 내 전공에서의 강의평가 척도는 강사나 교수의 정치적ㆍ사회적 가치와 신념, 그도 아니면 인간성(출석 및 성적 불량자에 대한 너그러움과 관대함)이었듯 싶다. 돌이켜보면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종종 학생은 쓴웃음을 지을 때도 있었으며, 적지 않은 교수님들은 적응을 하느라 꽤 애를 먹지 않았나 싶다.

장면을 전환하여 오늘날의 상황으로 되돌아오자. 과거처럼 여전히 학생들에게 강의란 일반적으로 대학생활이라는 통과의례를 크게 넘어서지 않는 듯싶다. 그러나 강의에 대한 외부의 평가는 과거에 비해 엄격해졌다.

휴강과 보강이 쌍개념이라는 인식도 자리를 잡았으니 교육 수요자에 대한 권리보호가 과거와는 천양지차인 셈이다. 한편, 학생들의 수업참여기준도 과거와는 달리 똑똑해졌다. 실용적이던가(취업), 실질적이던가(학점), 그도 아니면 재미라도 제공해야 한다. 특히 학점에 대한 민감지수는 엄청나다. 그럼에도 강의에 들어온 학생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왠지 자꾸 ‘조련된 고릴라’들을 보는 느낌이다.

신자유주의적 사회화가 학생들의 영혼을 삼켜버린 탓인지 취업의 고민은 있어도 ‘달리 생각하고 살아가기’에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본다. 사회학과의 특성상 지난 수년 동안 사회의 쟁점과 현안을 강의 내용과 연계하여 논쟁을 시켜보면 저학년에서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사고방식이 소위 사회의 ‘폭력적 상식’에 가까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모씨의 20대와 50대 연대론이 공허한 외침만은 아닌가 보다.

한편, 디지털사회에 걸맞게 학생들이 준비해온 발제문과 토론내용을 듣다보면 소위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지식검색’의 위력을 십분 느끼게 된다. 지식검색 한번이 도서실의 서고를 뒤지고 다니는 것보다는 편리할 뿐 아니라 이들의 클릭수가 산업경쟁력에 이바지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현재의 사회통념이라면 제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야단을 쳐봐야 소용이 없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포털 사이트의 지식검색창을 통해 지식의 열매를 따먹는데 익숙한 ‘훈련된 고릴라’와 창의력을 강조하는 지식기반경제 혹은 디지털사회는 뭔가 어색한 조합이지 않는가? 나는 희망한다. 최소한 내 강의에서는 고릴라와 지식검색이 춤추지 않기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