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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은 실재하는가” … 텍스트의 역사성 인식을
“유태인은 실재하는가” … 텍스트의 역사성 인식을
  • 양창렬 프랑스통신원
  • 승인 2006.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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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향_‘유태인 문제에 대하여’ 번역 계기로 유태인 담론 새롭게 읽기

“유태인의 비밀을 그의 종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종교의 비밀을 실제 유태인에게서 찾자. 유대주의의 세속적 토대는 무엇인가. ‘실용적’ 욕구, 개인적 이해. 유태인의 세속적 숭배는 무엇인가. ‘거래’. 세속적 신은 무엇인가. ‘돈’. 옳거니! 거래와 돈으로부터의 해방, 즉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유대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우리 시대의 자기 해방이로구나.”

 
마르크스의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 2부에 나오는 이 구절은 아직까지 반유태주의 혐의를 받는다. 로베르 미스라히는 심지어 ‘마르크스와 유태인 문제’(1972)에서 이 텍스트가 “인종 청소를 호소하는”, “19세기의 가장 반유태인주의적인 저서 중 하나”라고까지 말한다. 소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의 ‘유태인문제고찰’(1946)이나, 알랭 바디우의 ‘정황 3권, “유태인”이라는 단어의 효력들’(2005) 역시 반유태주의 논란에 휘말렸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사르트르의 책은 2차대전 직후 출간됐음에도 불구하고 유태인 문제를 다루면서 쇼아(Shoah) 문제에 대해 함구했다는 이유로, 바디우의 책은 ‘보편주의’의 이름으로 유태인들이 유대율법이나 전통을 통해 간직해온 환원될 수 없는 독특성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유로 비난 받았다. 이런 논란 속에서 최근 장-프랑수와 프와리에의 번역과 다니엘 벤사이드의 주석으로 이뤄진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의 역간은 단순한 고전 재번역 이상의 현실적 개입의 의미를 갖는다.

‘유태인 문제’를 다루는 위 세 저작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제목을 배신한다. 정확히 말해, 그들은 유태인 문제의 자리를 옮긴다. 가령, 마르크스는 브루노 바우어가 유태인의 정치적 해방과 종교 문제를 ‘철학적·신학적’ 행위로 환원하던 것을 권리담론에 대한 고찰을 통해 세속적 정치문제, 나아가 인간해방의 문제로 전치시키고, 사르트르는 그것을 반유태주의 문제로 전치시키며, 바디우는 그것을 자기부정을 통한 ‘보편적 주체’의 문제로 전치시킨다. 다시 말해 유태인 문제에 유태인은 없다. 왜 그럴까. 이들은 공통되게 유태인은 선험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맑스가 말하듯이, “유대주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역사에 의해 유지됐다”―이라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미리 가정된 유태인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가 아니라, 유태인을 생산하는 담론-실천 메커니즘을 추적하거나[유태인은 반유태인주의에 의해 생산됐다!], 그 고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대안[유태인도 아랍인도 더 이상 없다!]을 제시하는 데 있다.

요컨대, 유태인을 옹호하는 자들과 거리를 두고 철학적 개입을 하려는 자들 사이엔 “유태인이 (우리가 다뤄야할 문제의 대상으로서) 실재하는가 아닌가”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이 있는 것이다. 양 진영의 대화 불가능성 혹은 반유태주의라는 인신공격성 비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건 세 저작에서 자리 옮겨진 채 제기되는 고유한 질문들이다.

첫째, 사르트르는 “유태인은 다른 사람들이 유태인이라고 간주하는 사람”, 즉 “유태인을 만든 것은 반유태인주의”라 본다. 따라서 유태인 문제의 진정한 쟁점은 반유태인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다. 특히, 그는 반유태인주의를 통해 공무원, 임노동자, 소상인들이 (상상된) 유태인들에 반대하면서 그네들이 한 문화, 한 국가의 소유자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고 봤다. 이를 두고 사르트르는 “반유태인주의는 貧者의 스노비즘이다”라고까지 말한다. ‘이 나라는 이 나라 사람에게’라며 타자를 배척하고 자신이 그나마 나라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며 상상속에서 안도하는 인민들. 이들에 기생하는 극우파들. 여기서 “유태인”이란 이름은 반유태주의라는 인종주의 담론 속에서 만들어진, 자신과는 “다른”, 자신(의 일자리 및 생존)을 “위협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유적 이름일 뿐이다. 

둘째, 바디우의 유태인 담론은 그의 이전 책, ‘사도 바울, 보편주의의 정초’(1997)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책은 “바울이 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이타성들(유태인, 그리스인, 여성, 남성, 노예, 자유인 등)로부터 출발해 어떻게 보편적 사유가 같음과 평등(더 이상 유태인도 희랍인도 없다)을 생산하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따라서 진정한 유태인은 스스로의 특수성(정체성을 부여하는 술어들)을 부정하지만, 이 과정에서 돌출하는 보편적 특이성을 갖게 되는 주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유태인 국가’를 자처한다면, 더 이상 그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반유태인주의적인 나라가 된다.

이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을 넘어서는 새로운 국가 모색, 유럽통합 과정에서 기존의 국적을 그대로 유럽 차원으로 확장하는 배타적 주체화를 넘어서, ‘유럽인’이라는 기존의 술어를 버리는 과정 속에서 생산되는 도래할 ‘주체’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는 어떤가. 1816년 5월 4일 칙령 이후, 독일 유태인들이 공직에서 배제된 사건, 그리고 1840~42년간의 브루노 바우어의 텍스트에 대한 응답이라는 특정한 배경을 갖고 있는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유태 민족’, ‘시오니즘’, ‘반유태주의’ 등이 문제되기 이전의 글임을 잊어선 안된다.

대부분의 비난들은 이처럼 텍스트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것들이다. 더불어 벤사이드는 글 첫머리에 인용된 난감한 구절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답을 제안한다. “유대주의는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자본’이라는 이름을 아직 받지 않은 체제를 부르기 위한 잠정적인 별명, 혹은 자본주의의 정신이 될 것에 대한 은유적이지만 다소 부정확하고 초보적인 명명이었다”는 것. 이제, 맨 처음에 인용된 구절에서 유대주의를 자본주의로 바꾸어보자. 그러면 우리는 “거래와 돈으로부터의 해방, 즉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우리 시대의 자기 해방”이라는 슬로건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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