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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한테 전화오기도…첫 시간 평가기준 밝혀야
부모한테 전화오기도…첫 시간 평가기준 밝혀야
  • 이민선 기자
  • 승인 2006.05.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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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 성적에 ‘항의’하는 학생들 점점 늘어

임운택 계명대 교수(사회학)는 서울의 모 사립대에서 강의를 맡고 있을 때, 어느 중년 여성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의 주인공은 당시 임 교수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의 어머니. 그녀는 기말고사 후 성적 정산을 하고 있는 임 교수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아이가 왜 보고서를 성실하게 쓰지 못했는지, 왜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는지 긴 시간동안 설명했다. 성적정산에 ‘참고’해달라는 게 전화통화의 요지였다. 임 교수는 “전화를 끊고 정신이 혼미해졌다”고 털어놨다.

학점 때문에 학부모가 전화

매 학기 성적정정기간이 되면 학점을 둘러싸고 교수와 학생 간에 신경전을 벌이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직접 전화를 걸거나 이메일을 통해 자신의 애처로운 사정을 읍소하는 학생은 기본이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 졸업 또는 취업을 위해 학점을 올려줄 것을 부탁한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 학점이 나오지 않았다’며 따지는 경우도 대폭 늘었다. 시험 답안지를 두고 교수와 학생이 반나절 동안 문제와 답안을 재검토하는 사례도 나온다.

최근 심화되고 있는 취업난이 학점을 둘러싸고 신경전이 벌어지는 현실의 배경이 되고 있지만 한국 대학 교육에 내재한 문제가 일차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단적으로 ‘강의의 질 저하’는 성적에 대한 학생들의 이의제기를 늘리는 중요한 이유다. 천태영 충북대 강사는 “충북대 뿐만 아니라 이웃 대학에 강의를 나가보면 수업이 부실하면 여지없이 평가가 엉망이라는 항의성 이의제기가 나오게 된다”고 말한다. 휴강이 잦고 교수자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수업이 진행되면, 학생 입장에서는 당연히 평가의 잣대를 의심하게 된다는 게, 천 강사의 분석이다. 불안정한 지위에서 강의준비와 연구를 병행해야 하는 대학 시간강사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학생들의 ‘항의’를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학점 인플레이션을 막고 학생들의 학습량을 늘리기 위해 도입된 상대평가제도 교수와 대학강사를 ‘괴롭히는’ 요인 중 하나다. “노력한 만큼 학점이 나오지 않았다”며 문제제기를 하는 학생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ㅎ대 한 아무개 강사(철학)는 “충분히 A를 받을 학생도 상대평가제로 인해 B를 받을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학생들은 자신이 공부한 만큼 성적을 받지 못한다며 메일을 보내고 전화를 한다”고 말한다.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상대평가 때문에 밀렸다”고 설명해줄 때마다 곤혹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

이런 상황에 대해 한 강사가 마련한 대비책은 학생들을 ‘제대로’ 공부시키겠다는 욕심을 버리는 것.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학생 발표 때마다 토론 주제 선정부터 발표문을 만들 때까지 3번 이상 학생들이 자신을 찾아와 논의하도록 했으나, 요즘은 1번 정도로 줄였다. 중간고사 대체 보고서 주제도 평이하게 제시하고, 분량도 대폭 줄였다. 한 강사는 “학생들을 들들 볶고 A+주지 못할 거라면, 슬프지만 이런 대책을 쓸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성적 정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학생과의 신경전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평가방식의 세분화와 투명화가 필수적이다. 송호열 서원대 교수(지리교육)는 “학기 초 첫 수업 시간에 강의계획서에 뭉뚱그려 나온 평가요소들을 상세히 제시하고 설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출석 20%, 중간고사 30%, 기말고사 30%, 보고서 20%’ 등으로 평가기준을 보여주는 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 요소별 세부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 예컨대 출석·지각·조퇴 시 감점 수준과 감점이 되지 않는 사례, 중간 및 기말고사 시험의 형식·문항수·점수 배점, 보고서 평가 방법·배점·감점사항 등을 첫 시간부터 자세하게 밝혀야 한다.

채점 고려한 시험문제 출제 경향 생겨

시험문제 출제 시에는 채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지난해 교수로 임용된 김남연 강원대 교수(불문학)는 “귀찮더라도 시험문제를 낼 때 치밀하게 내면 채점하기가 편해진다”고 말한다. 논술식 시험이라면 문제의 답안에 어떠한 핵심 키워드가 들어가야 하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키워드를 언급한 경우 몇 점을 주어야 할지 등을 고려해 출제해야 한다는 것. 또 부분성적까지 세심하게 계산해놓고 학생의 이의제기에 언제든지 준비해야 한다. 김 교수는 “8년 동안 매 학기 1천명에 이르는 대단위 수업을 담당했었지만 시험 성적에 이의 제기한 학생은 4명뿐이었고, 이의제기를 하더라도 설명을 해주면 수긍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학점이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뿌리 채 뽑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교수자들이 취업난을 이유로 노력한 것 이상을 바라는 학생들의 요행 심리에 부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남영 경원대 교수(영문학)는 “나의 경우 학점과 관련해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걸 학생들이 더 잘 알기 때문에 이의제기가 거의 없는 편”이라고 말한다.
이민선 기자 dreamer@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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