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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향_일본의 대표적 좌파 지성지 ‘세카이’
해외동향_일본의 대표적 좌파 지성지 ‘세카이’
  • 라경수 일본통신원
  • 승인 2006.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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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화 일본의 좌익 선봉장…‘격차사회’ 주요 이슈로

지하철에서도 늘 책이나 신문을 읽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한국에서도 종종 회자하곤 한다. 그만큼 일본은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신문, 잡지, 서적 등의 출판문화가 탄탄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는 한국의 교수신문처럼 학계, 특히나 학자 및 연구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 지성지는 필자가 알기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학문적 식견을 피력할 수 있는 학술저널들은 물론, 학술성에 대중성까지 겸비한 전문 잡지들이 셀 수 없이 많기에 굳이 교수신문과 같은 매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대신, 나름대로 일본 지식인들의 대표적 담론표현의 장이 되고 있는 '세카이(世界)'라는 잡지를 소개할까 한다. '세카이'는 신문이 아닌, 월간지로 지식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사회현상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와 접근을 원하는 일반 독자들도 즐겨 찾는 잡지다. 이 때문에 정가 7백80엔(약 7천8백원)의 '세카이'가 발휘하는 사회적 학문적 영향력은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값어치가 있다.

'세카이'는 아사히신문과 더불어 기본적으로 좌파적 시각을 갖고 있는 대표적 매체다. 그래서 산케이신문, 요미우리신문, 산케이신문이 발행하는 '세이론(正論)', 그리고 문예춘추에서 발행하는 '쇼쿤(諸君)' 등 우익성향의 매체들과는 항상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특히, 근래에 들어 일본사회가 전체적으로 '우향우!'하고 있는 반면, 좌파매체들의 침체가 두드러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세카이'는 일본내 "사상과 지식 스펙트럼의 균형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세카이'는 또한 한국과 북한에 대한 글들도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고 있으며, 전체적인 논조도 꽤나 우호적이다. '한반도 때리기'에만 열을 올리는 '세이론'이나 '쇼쿤'과는 사뭇 다른 점이다.

이런 '세카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잡지를 출판하는 '이와나미(岩派) 서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와나미 서점은 창업자인 이와나미 시게오(岩波茂雄)가 자신의 성을 따서 만든 출판사로 1913년에 설립되었다. 지금도 고서점이 즐비한 도쿄의 진보쵸(神保町)에서 조그만 점포로 출발한 이와나미는 올해로 벌써 창업 93주년을 맞았다. 창업한 다음 해인 1914년부터 이와나미는, 당시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아사히신문 기자가 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소설, '고꼬로(こ?ろ, 마음)'를 출간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출판활동을 시작한다. 그 후, 1927년에는 동서고금의 고전문학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 '이와나미 문고'를, 1938년에는 사회적 문제와 논쟁들에 초점을 맞춘 '이와나미 신서'를 창간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와나미는 군부들의 ?! 鈞째? 방해가 심했던 제 2차 대전 와중에도 출판활동을 굽힘없이 이어갔으며, 패전 직후인 1946년에 지금의 '세카이'를 처음으로 발간, 굴지의 종합 출판사로 거듭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는다. 현재, 이와나미에서 발간하는 대표적인 잡지에는 '도서', '과학', '사상', '문학' 등이 있다. 어느 하나 중량감 있는 것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잡지 '세카이'는 "이와나미의 얼굴"이라 할 수 있겠다.

올해로 창간 60주년을 맞은 '세카이'는 양질의 정보와 심도있는 지식을 제공하는 '퀄러티 매거진'을 추구한다. 이 때문에 나름대로 이름있는 필진들 수십 명이 매월호마다 시론적 논문들을 기고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공동의 집"이라는 논리를 일관되게 주창하고 있는 동경대 강상중 교수도 '세카이'를 통해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일본사회에 발신하는 대표적 논객으로 꼽힌다. '세카이'가 다루는 주제들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에서부터 최근에는 인터넷, 학교, 에이즈, 지방분권, 의료복지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특히, '세카이'는 반드시 특집란을 마련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이다. 매호마다 사회적 혹은 학술적으로 쟁점이 되고 있는 특정 주제를 깊이있게 다루기 위해서 특집코너를 마련,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금년도 들어서 다뤄진 특집란 테마들을 소개하자면, "동아시아 공동체-미래에 대한 구상"(1월호), "현대 일본의 기분-어디로 향할까?"(2월호), "경기(景氣) 상승을 어떻게 볼 것인가?-양극화 확대 속에서"(3월호), "오키나와-미군 재편 '미일합의'는 깨지다!"(4월호) 등 다채롭다.

금번 5월호의 특집은 "탈(脫) 격차사회에 대한 구상-또 하나의 일본으로"라는 주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현재 일본에서도 '격차사회'라는 담론으로 사회 양극화 현상에 관한 논쟁이 뜨겁다. 그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잃어버린 10년'의 늪으로부터 겨우 빠져나와 일본 경제가 서서히 회복되고 있음에도 불구, 빈곤층이 점점 늘어나는 등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정권이 구조개혁의 일환으로 야심차게(!) 추진한 노동과 기업에 대한 규제완화가 오히려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소득을 저하시킨 반면, 경영자들의 부는 증가시켰다는 인식이 일본사회에 팽배해 있다. 이러한 경제적 격차가 교육, 문화, 정보 등 사회전반에 걸쳐 악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는 중산층의 몰락만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이 확산되면 될수록 경쟁적 사회로 변하고 저임금의 불안정한 노동문화가 조성돼, 결국 사회적 범죄, 자살, 도덕불감증 등으로 이어진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적 경쟁논리가 반드시 사회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강한 회의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일본사회다. 한국의 양극화 논쟁과 아주 흡사한지라, 밴치마킹할 점이 없나 일본의 '격차 논쟁'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이상, 일본의 대표적 지성잡지, '세카이'의 역사, 사상, 논조, 최근 이슈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때로는 일본 사회 내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때로는 일본이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보다 보편적인 '세계'를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 잡지 '세카이'가 추구하는 바가 아닐까? 창업주 이와나미 시게오는 "낮게 행동하고 높게 사고하라!"는 '低?高思'의 정신을 늘 출판사 경영에 투영시키고자 했다. 이 정신은 사회적 약자와 서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도 시대의 지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세카이'의 논조와 사상으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고 본다. 지금의 지식인들이 되새길 말이다.

라경수 / 와세다대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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