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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현-윤평중 교수의 成己成物에 대한 담론을 읽고
정대현-윤평중 교수의 成己成物에 대한 담론을 읽고
  • 윤사순 고려대
  • 승인 2006.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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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통합을 넘어 인간적 사유로

윤사순 / 고려대 명예교수

정대현 교수의 ‘성기성물론’을 놓고, 정 교수와 윤평중 교수가 교수신문에서 나눈 담론을 대하면서, 나는 동양철학에 대한 이들의 진지한 열의에 경외감을 금할 수 없었다. 

정대현 교수가 논한 ‘성기성물론’은 원래 ‘중용’에 담긴 이 사유의 현대적 유용성 을 주장한 이론이다. 윤 교수와 정 교수의 견해차는 이 ‘성기성물’ 사유의 범주적 성격과 가치의 성향 등에 관한 차이로 요약될 듯하다. 이런 견해차는 내 생각으론 이 사유의 성립배경과 연관사유 및 자체의 의미체계 등에 대한 해명에서 얼마만큼 해소되지 않을까 한다.

이 사유는 원천적으로 공자의 “자신을 수양하여 남들을 편안케 함(修己而安人)”이라는 이상에 연원을 둔다. 이 사유가 구체화되는 데에는 공자가 “인간에 대한 사랑(愛人)”으로 규정한 ‘仁’의 실현을 “타물에 대한 사랑(愛物)”으로까지 역설한 맹자의 사상을 거쳤다. 아울러 이는 ‘대학’의 “밝은 덕을 밝히고 민인을 친애함(明明德 親民)”과도 무관치 않다. 다만 이런 이상들보다 이것이 유학의 이상을 더 발전된 형식으로 그린 사유라는 데 특징이 있다.

여기서 또 유의해야 할 것은 ‘중용’의 저자가 모든 현상에 대한 이해를 인격신인 상제, 또는 天과 연관시키는 종교적 사고방식을 떨치고, 인간과 자연을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으로 낸 사유에 이것이 든다는 점이다.

누구인지 확실치 않은 그 저자(자사?, 한 사람이 아닌 듯)는 “誠이 없으면 사물도 없다”느니. “誠 자체는 天道이고, 성하려 함은 人道이다”라는 명제를 냈다. 그는 “지극한 성으로는 인성은 물론, 물성을 다 드러낼 수 있고, 나아가 천지(자연)의 化育마저 도울 수 있다”고도 주장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성이란 (나) 자신을 스스로 成己할 뿐 아니라, 타물도 이루는(成物) 근거라” 하였다. ‘성기성물’은 바로 이렇게 ‘誠’사상을 바탕으로 낸 것이다.

誠을 천도와 인도의 관계로 논한 것은 자연의 원리인 천도가 곧 인간의 ‘본받아야 할 원리’라는 천인합일사상에서 낸 이론이다. 이는 ‘주역’에서 자연의 원리를 사실적인 “元亨利貞”으로 파악한 것을 ‘성’이라는 원리로 바꾼 사유이기도 하다. 이 ‘성’의 기본 의미는 ‘정성’, ‘진실’이어서, 그 복합적 의미는 “성실하고 진실하여 거짓됨이 없음”이다. 천도를 성이라 한 것은 자연 법칙의 ‘일정불변성’을 인간의 ‘성실성’에 의탁하여 윤리의 원리로 나타낸 견해이다. ‘중용’의 ‘성론’은 이렇게 인간과 자연을 주체적, 윤리적 시각에서 포괄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로써 성론이 수양론 성격을 원천적으로 지녔지만, 수양론에서 그치지 않는 성향을 지녔음도 알게 된다.

‘성기성물’의 ‘기’와 ‘물’은 무엇을 가리키나. ‘기’는 인간인 나 자신이다. ‘물’은 인간을 비롯하여 사물일반을 가리키므로, 이 때는 타인과 타물을 총칭한 것이다. 따라서 ‘성기’란 곧 ‘나 자신을 이룬다’는 뜻이고, ‘성물’은 ‘타인과 타물을 이룬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룬다(成)’는 용어가 아직 불분명하다.

앞서 인용한 “성이 없으면 물도 없다”는 명제를 상기하면, 성은 기본적으로 사물의 인식능력을 바르게 하는 요건으로 상정됨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룬다’는 것은 안으로는 바른 자아의식 내지 자기자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고, 밖으로는 타인과  타물들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능케 함이라 하겠다. 하지만 ‘성’에 내포된 ‘성실’과 ‘진실’의 의미로 해서, 이는 인식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중용’에 쓰인 ‘성’의 수양차원(‘성하려 함’)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대학’에서도 중요시하는 ‘誠意’의 의미를 갖는다. 그 성의는 곧 意識과 의념과 의지를, 그 미분 상태로부터 분화된 상태에까지 일관하여, 정성껏 성실히 참되게 하는 것이다. 

성실·진실한 태도로 나 자신에 임하는 것은 음양의 氣를 바탕으로 하여 존립하는 자기를 하나의 ‘인격체’로 만드는 길이다. ‘나 자신을 이룬다’고 함은 바로 ‘나를 인격체로 만듦’이다. 이는 곧 자신의 인간됨을 질적으로 격상시킴이다. 다른 한편, 타인과 타물에 대하여서도 성의로 대하는 길은 곧 타인을 인격체로, 그리고 타물에게는 그 유의미성을 찾아서 대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는 타인과 타물을 대하는 데서도 인식 이상의 ‘변이’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 변이는 바로 공자 맹자가 역설한 仁性의 실현, 특히 그 확충적 실현에 의하여 초래된다. 인간애의 인성을 애물차원으로까지 실현하면, 그 결과는 우선 타인에 대한 호의적인 배려(恕)가 있게 되고, 나아가 자연일반에 대한 애호까지 발휘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타인에게 ‘인격의 감화’를 주고, 자연에게도 그 ‘化育에 도움’을 준다. 따라서 “타인과 타물을 이룬다”는 것은 타인들을 인격으로 감화시키고, 자연마저 제대로 화육케 함이다. 이는 결국 사회적으로 타인들과 공존 이상의 ‘화해로운 공생’을 가져오고, 자연 친화로써 자연환경과도 ‘조화로운 공생’에 성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인격체로 행위하게 하여, 화해로운 사회를 조성하고 자연과도 조화를 이루는 경지가 “성기성물”의 궁극적 이상경지이다.

이런 의미의 ‘성기 성물’은 현대에도 그 가치를 함유하는 이상적 사유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직접 관련이 없을 듯한 자유와 평등도 주로 인격체로서 영위하는 개인생활이라든가, 타인들과 함께하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요건으로 요청되게 마련이다. 유학의 ‘성기 성물’이 다만 윤리측면에서 제시한 사유가 아니고 정치 사회의 측면으로도 응용될 길이 열린 것임을 감안하면, 나의 이러한 해석이 더욱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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