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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신발’이 밝히는 충격의 진실…존재(자)가 드러난다
고흐의 ‘신발’이 밝히는 충격의 진실…존재(자)가 드러난다
  • 김재호
  • 승인 2022.10.17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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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예술 작품의 샘』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 한충수 옮김 │ 이학사 │ 214쪽

“예술의 작품[작동]은 작품 속에서 존재자에 관한 진실을 산출하는 것,
예술은 진실의 스스로를-작품-속에-작동하게-놓음”

여기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신발」(1866)이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는 최근 번역된 『예술 작품의 샘』(한충수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번역)에서 “반 고흐의 회화는 농민의 신발 한 켤레라는 도구가 진실로 어떤 무엇으로서 존재한다고 할 때 그 무엇을 비로소 열어젖힌 곳”(48쪽)이라고 설명했다. 고흐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막혀 있는 진실의 세계에서 또 다른 무한한 가능성을 작품으로 열었다. 

 

기자는 「신발」을 보자마자 「나의 낡은 캐쥬얼화」(유정고 밴드, 2001)라는 노래가 떠올랐다. 고흐가 어떤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기자에게는 「나의 낡은 캐쥬얼화」의 노랫말이 와닿았다. “나의 낡은 캐주얼화 / 색도 많이 바랬어 / 나와 함께 많이 다녔지 / 오랫동안 많이 다녔어 / 그냥 너를 노래하고 싶었을 뿐야” 고흐의 「신발」을 이해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지난달 한 일간지는 고흐의 「신발」을 둘러싼 철학 논쟁(「고흐의 '신발' 논쟁, 뭣이 중할까...정답은 없고 해석은 열려 있다,」, 한국일보, 2022.09.20.)을 펼쳐 보인 적이 있다. 하이데거가 고흐의 신발에 대해 농촌의 여인이 신었던 고단한 노동을 진리와 존재자의 진실 측면에서 해석을 하자, 샤피로가 신발은 파리의 대도시에 사는 도시인의 신발이라며 나치에 부역했던 감정을 드러내며 반박한 것이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예술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해체'의 차원에서 지적했다. 

때마침 번역된 『예술 작품의 샘』은 하이데거의 예술에 대한 시각을 접할 수 있게 해준다. “농민이 살아가는 세계 전체가 이 신발 속에 있다. 그렇게 예술의 작품[작동]은 작품 속에서 존재자에 관한 진실을 산출하는 것”(203쪽)이라고 설명된다. 이 설명은 『예술 작품의 샘』 끝에 부록처럼 실린 한스-게오르크 가다머(1900~2002)의 「입문을 위하여」(1960)에 담겨 있다. 

 

농민의 세계 전체가 신발 속에 있다

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샘’을 이해하기 위해선 세계와 대지, 존재와 존재자, 진실과 앎, 작품과 자연 등의 개념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 작업은 대단히 어렵고 수고로운데, 여기서는 몇 가지 선언적 주장과 같은 방식으로만 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샘’을 이해해보자. 

첫째, 예술 작품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은 작품 속에서 진실을 창작하며 보존함”이라며 “그렇다면 예술은 진실이 생성되고 벌어짐”라고 밝혔다. 그 진실이란 가다머가 고흐의 「신발」을 통해 얘기한 것처럼, 농민이 살아가는 세계 전체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담긴 사랑하는 이의 흔적일 수도 있다. 예술 작품을 넘어 예술 작품의 샘에 이르려는 이유는 아마도 진실의 차원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작품이 탄생하는 데 필요한 ‘테크네’를 언급했다. 테크네는 활동의 차원에서 수작업, 수공예를 뜻하는 게 아니라 ‘앎의 한 방식’을 의미한다. 앎은 보았음을 뜻하는데, “현재하는 것을 그 자체로서 감지하는 것”을 말한다. 하이데거는 그리스인들을 인용하며, 앎의 본재는 “존재의 막힘을 없애는 것에 기초한다”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농민의 신발이라면 그들의 고단함 혹은 수고스러움이 보이고 드러나며 무수히 많은 또 다른 농민들이 떠오를 수 있다. 작품이 비유이고 상징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고흐의 「신발」는 과연 어떤 진실을 열어젖히는 것일까? 그림=https://www.vincentvangogh.org/a-pair-of-shoes.jsp

둘째, 예술 작품은 ‘투쟁’의 긴장 관계에 있다. 가다머의 설명에 따르면, 예술 작품은 거기에 존재하면서 스스로 존재 사건이 된다. “그 사건은 기존의 익숙한 모든 것을 뒤집는 충격이고, 그 충격 속에서 거기에 존재한 적이 없는 세계가 열리게 된다.”(205쪽) 고흐의 신발을 보며 어떤 누군가는 자살한 이가 남겨 놓은 신발을 떠올렸을 수 있다. 

한 사람이 결코 마주할 수 없는 세계. 그 세계의 가능성 중 일부는 하필 고흐의 신발 앞에 놓였다. 이렇게 놓이기까지 예술 작품인 고흐의 신발은 수많은 시간을 외롭게 버텼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품으며 열어놓고 있다. 예술 작품은 고립되어야 더 많이 열리는 상태에 이른다. 작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세계(막힘없앰-자라남)와 대지(막힘-막음)는 틈과 막 사이의 투쟁 속에 들어선다”(83쪽)라고 표현했다. 또한 “예술은 진실의 스스로를-작품-속에-작동하게-놓음”(54쪽)이기도 하다. 

 

“막고 여는” 예술 작품의 투쟁…익숙한 모든 것을 뒤집는 충격

셋째, 예술의 원천으로서 샘이 있기에 예술 작품이 있다. 우리는 대부분 작가의 예술혼에 의해 작품이 탄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상식을 뒤집는다. 예술이 있기에 예술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의 샘』의 마지막에서 하이데거는 독일의 시인 횔덜린(1770∼1843)의 말을 인용했다. “떠나기가 어렵습니다, / 샘 가까이 사는 것은, 그 장소를.”(167쪽) 예술 작품보다 예술의 샘이 더 중요하다. 책의 제목이 ‘예술 작품’이 아니라 ‘예술 작품의 샘’인 이유다. 

하이데거는 “예술이 벌어지기 때문에, 또 벌어지는 한에서 작품의 필연성이[작품이 필연적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작품의 필연성은 비로소 예술 작가의 [창작] 가능성의 근거가 됩니다”라고 적었다. 다시 말해 예술 작품이 회화, 조각, 언어, 소리 등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라 예술이기에 그렇게 표현되는 것이다. 

넷째, “모든 예술은 그 본재에서 시로 짓는 것이다.”(174쪽) 예술은 본질에서 시의 구조와 특성을 보인다. 하이데거는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르게 존재하게 되는 열린 곳을 깨서 여는 것”이라며 “모든 예술은 존재자 그 자체의 진실이 도래하는 일이 벌어지도록 놓아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야말로 비유와 상징으로 점철돼 있다. 물론 시도 다양하지만, 시 자체는 함축이고 전복이고 충격이고 사건이다. 

가다머는 예술과 시에 대해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한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미 형태를 갖춘 것의 형태를 바꾸거나 이미 앞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을 따라 만드는 일이 예술의 본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무엇인가가 진실한 것으로서 분출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게 예술의 본재이다. 즉 ‘열린 자리가 스스로를 깨서 여는’ 게 예술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진실의 본재라는 것이다.”(213쪽) 

예술과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고유하고, 읽고 보는 이들에게 고유한 진실을 드러나게 한다. 마르지 않는 예술 작품의 샘이 있기에 이 세계의 진실은 천천히 조금이라도 발견된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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