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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1984
  • 최승우
  • 승인 2022.10.13 12: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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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지음 | 김병익 옮김 | 문학과지성사 | 456쪽

<타임> 선정 ‘현대 100대 영문소설’
<뉴스위크> 선정 ‘최고의 책 100’
<옵서버> 선정 ‘역대 최고의 소설 100’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20세기 최고의 영문학 100’
<르몽드> 선정 ‘세기의 도서 100’
<BBC> 선정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설 100’
<가디언> 조사 ‘최고의 책’ 1위

냉철한 통찰과 뜨거운 열정으로 늘 깨어 있던 시대의 증인, 정치 소설을 예술의 수준으로 승화시킨 조지 오웰 최후의 역작 『1984Nineteen Eighty-Four』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조지 오웰의 『1984』는 흔히 말하듯 미래소설이자 정치소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은 1948년에 36년 후의 세계를 묘사했으니 미래에 관한 픽션이요 스탈린과 히틀러가 따를 수 없는 완벽한 전체주의를 설계했으니 정치적 문학이다.

이 작품은 상상의 미래를 그린 것이지만 비평가 어빙 하우가 지적하듯 “현대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언, 차라리 현대를 대변”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의 통치 방법과 정치철학이 튀어나오는데, 이에 그치지 않고 언젠가는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사회 속에서 패배하는 인간의 정신적 파탄이 추적되었기 때문이다.

정치학도였으며 기자로서, 그리고 출판인으로서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해 온 번역자 김병익은 독재정권하이던 1968년 오웰의 책 두 권을 번역한 이후 오늘날의 언어에 맞게 다시 다듬어 새로이 선보이기까지 끊임없이 오웰의 소설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 이유는 그의 악몽이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한 억압이 되어왔음을 긴 시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 오랜 시간 양상은 다르나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기에, 안타깝게도 오웰과 『1984』는 여전히 현재적이다.

빅브라더가 지켜보고 있다

1984년,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의 3대 초국가로 분할된 무한한 전쟁의 세계다. 이 세 나라는 비슷한 정치·사회체제를 유지하면서 ‘승리도 패배도 없는, 전면전도 종식도 없는’ 전쟁을 끊임없이 계속한다. 윈스턴 스미스가 살고 있는 곳이 오세아니아의 ‘제1공대’인 런던이다.

‘당’이 자신의 권력체를 의인화해서 내세운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오세아니아의 사회는 사상 통제와 과거 통제로 국가를 이끌어간다. 양면 텔레비전으로 송수신이 가능한 텔레스크린을 통해 개인의 사생활을 철저히 감시하면서 이루어진다. 텔레스크린은 거리에도, 방에도, 화장실에도 달려 있어 사사로운 행위는 물론 얼굴 표정까지 포착한다.

1960년대의 혁명과 내란을 통해 성숙한 오세아니아 사회는 궁핍하다. 국민들은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고 빈민가에서는 쥐가 아기들을 물어뜯는다. 곳곳마다 빅 브라더의 포스터가 살벌하게 붙어 있고 공중에는 헬리콥터가 정찰하고 시내에는 사상경찰과 텔레스크린이, 야외에서는 마이크로폰이 감시한다. 스파이단 소속 어린이들은 부모의 이단적 언행을 고발한다.

그리하여 부모와 자식 간의 전통적인 유대가 끊어지고 ‘2분간 증오’와 ‘증오주간’을 통해 적개심을 기르고 개인적인 친분은 경원된다. 일단 사상죄로 적발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되어 모든 기록에서 말소된다.

역사 조작을 담당하는 기록국 소속 윈스턴은 위험하다. 그는 당을 의심한다. 과거를 기억하려, 확인하려 한다. 일기를 쓴다. 그리고 사랑을 한다. 독재 권력을 절대화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욕구마저 금지되는 사회, 24시간 감시받는 사회, 개인의 생각마저 통제되는 사회. 윈스턴은 인간적으로 살기로 결정한다. 인간적인 가치를 믿는 것 자체가 그놈들을 패배시키는 것이다!

여전히 이어지는 ‘오웰적 악몽Orwellian nightmare’
“우리는 구글을 검색했다. 이제는 구글이 우리를 검색한다.”
_쇼샤나 주보프(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명예교수)

2013년 언론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미국 국가안보국NSA과 영국 정부통신본부GCHQ가 신-구 대륙을 잇는 광케이블을 통해 1년 6개월 동안 6억 건의 전화 통화, 3,900만 기가바이트의 인터넷 전자우편과 접속 기록을 도·감청했다고 한다.

두 나라 정부는 이를 위해 550명의 요원을 전속 배치했는데 <가디언>은 이들이 매일 도·감청한 정보량은 대영도서관이 보유한 정보 총량의 192배에 해당한다며 그것이 “광케이블로 연결된 모든 형태의 정보를 빨아들여 세계 인터넷 사용자 20억 명의 일상을 감시했다”고 지적했다.

쓰는 당시에는 미래였으나, 우리에게는 이미 오래전 과거가 된 1984년. 작품 『1984』의 빈곤과 결핍에서는 벗어났으나, SNS와 개인방송의 발달로 표현 매체가 독점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여전히 『1984』 다시 찾고 새로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이 책이 경고의 목소리일 뿐만 아니라, 경고로서 오웰이 그린 징후를 우리가 현재로서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1948년에도 ‘1984년’을 살고 있었고, 1984년에도 ‘1984년’ 속에서 살았으며, 오늘날에도 ‘1984년’을 살고 있다. 우리가 비판적인 시각을, 인간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존엄을 지키지 않는 한, 오웰의 『1984』는 끊임없는 현재성으로 우리에게 공포의 그늘을 던져줄 것이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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