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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도 일할 수 있을까···12월만 되면 숨막혀
내년에도 일할 수 있을까···12월만 되면 숨막혀
  • 정이환 경희대
  • 승인 2006.04.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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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산책: 『부서진 미래』(김순천 외 지음, 삶이보이는창, 416쪽, 2006)

비정규직 관련 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정부와 노동계가 팽팽한 대립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비정규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책이 출판되었다. ‘부서진 미래’는 르뽀문학 모임인 ‘삶이 보이는 창’ 동인들이 다양한 비정규노동자들을 인터뷰한 기록이다. 여기엔 가정복지 도우미, 간병인, 노숙자, 건축설계사, 영화 스태프, 취업준비생, 주유소 아르바이트생, 대학교 경비원, 전자업체 비정규노동자, 자동차 제조업체 비정규노동자, 학습지 교사, 기간제 교사, 이주 노동자, 농업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이 실려 있다.

이들은 우리가 늘 만나지만 평소엔 자기 목소리를 잘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점을 의식한 듯 ‘부서진 미래’는 이들의 목소리를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특히 면담자가 던지는 질문과 이에 대한 응답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어서 생생함이 더하다. 간간이 삽입되어 있는 흑백사진들은 현장감까지 살려주고 있다.

이 책의 인터뷰 대상자들 중에는 노조 전임간부도 있고 그런 경우 약간은 상투적이고 설교조의 얘기도 듣게 된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며 이들이 들려주는 얘기도 잔잔한 일상의 얘기들이다. 그런데 냉혹한 현실은 그들의 소박한 꿈마저 깨뜨려버린다. 가정복지 도우미인 이점순씨는 무릎도 아프고 수입도 얼마 안되지만 지금 하는 일이 좋다. 특히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일에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12월이 되면 숨막히고 힘들어지는데 그것은 다음 해에 일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되는 달이기 때문이다. 영화 스태프인 최진욱씨는 이 일이 좋지만 월 100만원도 안되는 수입 때문에 결혼하고 애 낳을 생각하면 막막하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보통 노동자처럼 살고 싶지만 모두 파견노동자로 신분이 바뀌어 버렸다.

이들에게서는 IMF 경제위기의 상흔도 뚜렷이 발견된다. 간병인인 정금자씨는 예전엔 ‘여기가 내 직장이다’라는 소속감을 가지고 일했는데 간병인 소개시스템이 바뀌어 유료업체들이 경쟁하는 체제로 바뀐 이후 신분이 불안정해졌다. 노숙자인 이곤학씨는 원래 건축 노동자였는데 1998년에 일이 끊기면서 노숙을 시작했다. 건축설계 노동자인 장달수씨는 IMF 경제위기 때 실직을 한 이후 계약직 노동자로 이 직장 저 직장을 떠돈다. 자동차 제조업체에서도 IMF 경제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급증했다. 이것들은 결국 세계화가 우리나라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고통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나라 비정규노동자의 실태를 전체적으로 알게 해 주는 책은 아니다. 우리나라엔 여기 소개된 사람들과 상이한 직종, 상이한 유형의 비정규노동자들이 얼마든지 있다. 또한 소개되는 비정규노동자들의 ‘문제’가 샅샅이 파헤쳐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책에는 기간제(계약직) 노동자, 파견노동자, 사내하청 노동자, 일용노동자, 특수고용직 노동자 등 여러 유형의 비정규노동자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각 유형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가 잘 드러나 있진 않다. 그러나 이 책은 비정규직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어떤 책보다도 그들의 희망과 불안, 그리고 고통을 잘 전달해 주고 있다. 저자 중 한 사람은 서문에서 “생의 하중을 견뎌오면서 만들어진 그분들의 얼음작살같은 목소리가 될 수 있으면 마음에 오래오래 박혀서 많이 아파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아마 이 책의 저자들은 사회의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관료, 기업인, 교수같은 사람들도 이 책을 읽고 아파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 책은 이런 목적을 대체로 잘 달성하고 있다고 보인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상투적 고발보다 그들의 일상적인 삶의 얘기가 담겨있기 때문에 더 강한 여운을 남긴다.

그런데 비정규노동자의 문제를 아파하는 것과 대안을 찾는 것이 별개의 문제라는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또한 노동문제라는 측면에서 보면 비정규노동 문제는 고발하고 공감하는 단계를 이미 지났고, 대안을 모색하는 단계도 이미 지났으며, 지금은 구체적 대안을 실행하고 그것을 평가해야 할 단계에 와 있다. 여기엔 뜨거운 가슴과 함께 차가운 머리도 요구된다. 비정규직에 대한 가장 간단명료한 대안은, 간병인인 정금자씨가 바라듯, 정규직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사용자들은 정규직 고용을 꺼리고 있다. 그러면 강제로 비정규직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겠는가? 그렇게 하면 정규직 고용은 늘겠지만 대신 고용량 자체가 감소하고, 분사(分社)와 같은 형태의 은폐된 비정규 고용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사용자들의 부도덕성에 일차적 원인이 있겠지만 우리나라 기업내부노동시장의 경직성에도 원인이 있다. 비정규노동 문제에는 우리나라 노동시장 전체의 문제가 압축되어 있으며 따라서 대안도 전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안은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은 이점순씨의 소박한 바람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정이환 / 서울산업대·사회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제조업 내부노동시장의 변화와 노사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유럽연합의 비정규고용지침과 주요 국가들의 노동입법 동향’, ‘노동시장유연화와 노동복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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