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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론'이 왜 문제인가··· "구조 위에서 인간 주목했다"
'기원론'이 왜 문제인가··· "구조 위에서 인간 주목했다"
  • 주익종 / 낙성대경제연구소
  • 승인 2006.04.04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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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논쟁-해방전후사 재인식(3):정병욱 박사의 논평에 대한 반론

필자는 지난 호에 실린 정병욱 박사의 에커트 교수 논문에 관한 논평을 읽으면서, 인문학 에서는 용어를 약간만 다르게 표현해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논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정 박사는 에커트 교수의 논문이 ‘현대 한국의 식민지 기원론·연속론’을 주장한 것이며, 그 내용은 한 마디로 ‘1937~45년간 전쟁기 공업화의 유산이 1950~60년대 경제부흥과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라고 요약하였다. 그는 에커트 교수가 식민지 경험은 과장하고 해방 이후 요인은 경시했으며, 식민지 경험에 대한 파악도 일면적이고, 개별 인적 요소에만 주목하고 전체 구조를 보지 못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정 박사의 논평이 에커트 교수의 논문의 논지를 왜곡하고, 또 지나치게 왜소화시켜 볼품없는 글로 오해하기 쉽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여, 이 글을 쓴다.

우선, 용어부터 검토해보자. 정 박사는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기반이 되었다”라고 요약하고 있지만, 에커트 교수의 주장은 “영향을 주었다” 혹은 “일조했다”라는 표현으로 요약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강한 표현이다. ‘A가 B의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면, ‘A가 없으면 B가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에커트 교수는 이렇게까지 강한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글의 맺음말에서 “전쟁 준비에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과정은 조선의 경제와 사회를 재편하였고, 오늘날에도 한반도의 남쪽에서 여전히 진행중인 공업화와 사회 변화과정을 활성화하고 가속화시켰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는 또 “식민지 지배가 한국의 공업화와 사회변화를 가능하게 한 유일한 길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라고 단서를 달았다. 그는 ‘A가 B에 영향을 미쳤다, 일조했다’는 의미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에커트 교수의 주장은 ‘현대 한국의 식민지 기원론·연속론’이라 부를 만하다. 그러나 이 기원론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현대 한국의 조선시대 기원론도 가능하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 왜 조선시대의 자취가 없겠는가? 마찬가지로 오늘의 한국 사회에 왜 식민지시대의 자취가 없겠는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기원결정론’이다. 즉 특정 시대가 훗날의 어느 시대를 결정지었다는 식의 주장이 문제인 것이다. 예컨대 1994년도 World Development에 실린 콜리(Kohly)의 글처럼,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현대 한국에 발전국가를 남겨주었고 그 덕분에 한국의 고도성장이 가능했다는 식의 ‘기원결정론’이 잘못된 것이다.

반면 에커트 교수는 그러한 주장을 한 바가 없다. 그는 현대 한국의 운명과 행로가 식민지 시대에, 특히 그 말기에 결정되었다거나, 식민지 경험과 해방 후 요인 중 전자가 현대 한국을 형성하는 데서 더 중요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역사가들이 여태껏 강조해온 식민지하의 수탈과 억압, 저발전, 피폐 외에도 사회간접자본의 축적, 공업화와 이농, 조선인의 출세기회 확대, 교육 확대 등의 현상이 아울러 나타났고, 이것을 시야에 넣어야 19세기 말 이후 100여년에 걸친 한국 공업화의 장기적 과정이 제대로 이해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조선식산은행 ©

비유를 들어보자. 초등학생 시절 훌륭한 교육을 받은 한 성인이 있다고 하자. 그가 초등학생 시절에 받은 좋은 교육의 자취는 성인인 그에게 분명 남아 있을 것이다. 언어 교육을 잘 받았다면 어학 능력이 개발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고, 많은 동화와 동시를 읽었다면 풍부한 감성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한 성인이 뛰어난 언어능력을 갖고 있는데, 그가 초등학교 시절에 좋은 어학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면, 양자의 관련성을 지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초등학교 시절의 어학교육과 중고교나 대학교 시절의 어학교육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정 박사는 마치 에커트가 오늘의 그를 만드는 데서 초등학생 시절이 중요했는가, 아니면 중고생이나 대학생 시절이 중요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교생이나 대학생 시절보다 초등학생 시절을 더 중시한 것처럼 본다. 이는 오독이다. 이렇게 잘못 읽으면, 제대로 논의를 전개할 수 없을 것이다.

전시총력전체제 속에서 한국인 노동자와 기술자는 양적 질적으로 성장했고 기업가와 기업내 관리자, 병사와 장교가 급증했으며, 사회적으로는 이농과 도시화가 급진전했다. 에커트는 이러한 변화가 현대 한국의 공업화와 사회 변화 과정과 기본적으로 부합했다는 의미에서, 현대 한국의 식민지 기원론·연속론을 주장한 것이다.

물론 비유컨대, 에커트는 앞의 성인이 초등학교 시절에 훌륭한 어학훈련을 받았던 것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이 논문에서 일제말의 총력전체제 속에서 한국인들이 얻은 출세와 성장의 기회를 강조했지만, 이것이 그가 보는 식민지의 전체상은 아니다. 억압과 수탈, 저항, 피폐 등 ‘그 역사의 더 어두운 면들’이 있지만, 그에 관해서는 이미 더 광범위하게 밝혀져 있기에 그가 언급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는 그간 한국의 역사가들이 수탈과 저항의 이분법적 구도로 이 어두운 측면은 충분히 밝혔으니 이제, 한국인들이 교육을 받고 해외에 진출하고 관리와 군인, 은행원과 회사원, 기술자가 되고 기업가가 된 사실도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조선에서의 식민지 지배를 이해하는 데 역사적으로 중요한 데도 기존 논의에서 무시되어 온 양상들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이며, 이 한국인의 출세와 성장이 “복합적인 식민지지배의 역사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상기시켰다.

따라서 식민지 경험에 대한 에커트 교수의 파악이 일면적이라는 정 박사의 논평은 지나치다. 논문이란 본래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쓰는 것이 아닌가. 에커트 교수는 그간 제대로 언급된 적이 없던 한국인의 출세와 성장의 사실을 조목조목 밝힌 것뿐이며, 일본에 대한 협력, 군 출신의 정치 엘리트가 갖는 비민주성, 사회에 대한 지도력을 결여한 자산가 계급 등의 부정적 측면이 수반되었음도 언급하였다. 다만, 한 논문에서 다 상세히 논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또 정 박사는 에커트 교수가 인적 요소에만 주목하고 사회 구조적 측면을 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예컨대 박정희와 같은 식민지기의 소수의 한국인 엘리트가 해방후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식민지 교육 및 취업구조가 다수의 한국인을 배제하고 그 소수만을 선택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본다. 해방후 박정희와 같은 사람들의 활약이 큰 것은 식민지기의 인적 성장이 빈약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주장한다. 필자에게는 좀 궤변 같은 느낌이 든다.

박정희와 같이 재능 있고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일본 군국주의의 파도 속에서 기회를 잡았다. 박정희가 보통학교 교사직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훗날 일개 교장선생님으로서 일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팽창하는 일본 제국주의 속에서 군인으로서 입신양명할 기회를 포착해 엘리트 청년장교로 변신했다. 마찬가지로 같은 기간중 수많은 젊은 ‘박정희들’은 새로 열린 기회를 찾아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은행원이 되고 기술자가 되고 관료가 되었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나자, 이들이 정치인, 관료, 군인, 경제인으로서 독립국가의 주역이 되었다. 이들은 일제말 군국주의와 제국주의가 총력전을 수행하느라 본의 아니게 제공한 기회를 움켜쥐는 데 성공한 자들이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에 무관심하거나 그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하라고 해서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좋은 취직자리를 얻어 잘 살고자 하는 경쟁은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수많은 젊은 ‘박정희’들은 본의 아니게 일제가 열어준 기회를 차지하고자 하는 경쟁을 벌였고, 거기서 크고 작은 승리를 거둔 자들이 자신의 운명을 개선하고 훗날을 위한 경험과 자질을 갖추어 갔다.

에커트 교수의 말대로 “역사가의 목적은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복합적인 식민지 지배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의 의식과 행동 속에는 그것의 어떤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인지, 해방 후의 한국인들은 그 재료로 어떤 역사를 만들었는지를 본격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주익종/낙성대경제연구소·경제사

필자는 서울대에서 ‘일제하 평양의 메리야스공업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새로운 한국경제발전사’(공저), ‘대군의 척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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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2006-04-05 15:03:12
에커트 얘기를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궤변 아닙니까? 그의 책 제목이 뭡니까? 제국의 후예 아닙니까.. 제국의 후예라는 것이 상징하는 것이 단지 교육 잘받은 초등학생을 가르친 선생 정도의 의미인가요? 식민지기 수탈과 성장이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것은 상식임에도 그것을 후예라는 표현을 통해 설명하는 것은 결국 제국주의를 기회를 준 교육자로서 일반화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무어라 설명할까요... 논문이 지면이 한정되었기 때문에 그 부분 설명을 뺐다면, 역사상 자체의 구성이 지면사정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해도 되는걸까요? 물론 이미 알려진 얘기를 또 언급하는 것이 비생산적일 수 있지만, 에커트의 역사상에 제국주의지배의 부정적인 측면이 어떻게 고려되고 있습니까? 그건 언급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일제하를 어떻게 총체적으로 구상할 것인가의 문제의식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부분을 일부러 빼고 역사상을 구성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에커트가 의도하는 한국근대사의 역사상이 아닙니까? 다 아실텐데 이런식으로 반론을 표하는 것이 더 궤변인 것 같네요.. 더불어 가정내 폭력이 일상화된 아버지와 선생에게서 교육받은 아이가 언어능력이 뛰어날지 몰라도 폭력적이며 이기적인 성인으로 커간 것이 그 아이의 일생이 아닐까요? 그런 생각해본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공부잘하고 똑똑하니 인간성 거지같아도 성공한 성인라고 생각하는 그 세계관 그게 에커트와 선생의 세계관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