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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비평_베스트셀러를 점검한다 (1)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기획비평_베스트셀러를 점검한다 (1)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 서영인 문학평론가
  • 승인 2006.04.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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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성과 사회성, 그 위태롭고도 절묘한 접점

우리나라엔 베스트셀러는 있지만 이에 대한 비평은 없다. 왜, 무슨 이유로, 누구에 의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에 대한 적절한 비평이 없으니,  세간에 회자되는 베스트셀러를 읽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주요 신문에는 주례사 비평만이 넘쳐날 뿐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양질의 베스트셀러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베스트셀러가 있다. 이번 교수신문의 ‘베스트셀러를 점검한다’는 베스트셀러를 비평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기획된 연재물이다. 첫번째 비평 대상이 된 책은 사형제도 폐지 등에 생각할 거리를 던지고 있는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다. /편집자주
 

공지영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소담출판사)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푸른숲)이 3월 첫 주부터 ‘3주간 교보문고 문학부문 베스트셀러 1,2위를 석권했다. 강동원과 이나영이라는 두 흥행 스타를 캐스팅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영화화 소식과 ‘냉정과 열정사이’의 작가 츠지 히토나리의 명성이 일정한 역할을 했겠지만 어쨌든 작가 공지영의 대중적 흡입력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비평이 그다지 활발하게 개진되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 평단의 현실이며, 이는 상업주의와의 결탁이나 대중영합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 때문이기도 하고, 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유사한 패턴을 반복하고 있어서 작품에 대한 분석이 그다지 생산력 있는 결과를 산출하지 못하는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베스트셀러 비평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인 문화 트렌드 점검을 위해서도 작품에 대한 풍부하고도 다양한 해석은 분명 필요하다. 캐릭터나 배경에 대한 단선적 분석으로 비평을 대신하거나 모두를 유행의 한 경향으로 뭉뚱그려 버린다면 우리 문화의 심층을 엄밀하게 해부하고 그 공과와 문제성을 따지는 일이 충실히 이루어지기 힘들다. 사회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상업주의 메커니즘이나 자본의 논리가 출판계에서도 여지없이 관철되고 있고, 그 위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고하여 도무지 출구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대중들이 좋아하고 선택하는 문화상품들이 새로운 문화적 실천의 장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

특히 공지영은 좀더 세심한 비평적 관심과 해부가 필요한 작가가 아닌가 한다. ‘고등어’로부터 시작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착한 여자’, ‘봉순이 언니’, 그리고 최근의 두 작품까지 공지영은 출간하는 작품마다 빠짐없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우리 시대의 몇 안되는 스타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물론 이러한 대단한 대중적 파급력이 공지영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대부분의 대중소설들이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효과적으로 영합하면서 대중들의 정서에 안착하는 경향이 강하다면, 공지영은 오히려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유발하는 작가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공지영의 작품은 항상 사회성과 대중성의 미묘한 접점에 서서 그 가치와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 접점은 긍정적인 방식으로든 부정적인 방식으로든 우리 시대의 문학이 대중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가에 대한 소중한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대해 사고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베스트셀러에 대한 숱한 선입견과 불편한 시선들을 정직하고도 내밀한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역시 사형제도라는 사회적 이슈를 소설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단 사회적 문제설정과 관심유발을 의도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생명존중이나 인권의 측면에서든 범죄예방이나 사회구성원의 안전문제라는 측면에서든 사형제도가 그다지 바람직한 제도가 아니라는 의견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기본적 예의나 존엄을 갖추지 못한 인간마저도 보호해야 하는가 라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처벌체계가 있는 것이 범죄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느냐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성론도 여전히 팽팽하게 논란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사형제도를 존속시키느냐 폐지하느냐가 아니라 사형제도를 둘러싼 많은 사회문제들을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사형제도폐지를 단지 생명존중이나 인권보호의 차원에서 되풀이하지 않는 미덕을 지닌다. 피해자의 가족인 삼양동 할머니의 에피소드는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일의 지난함과 숭고함을 깊은 감동과 함께 전하면서 동시에 사형제도가 난데없는 횡액을 당한 피해자의 사후보상을 외면하는 면죄부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무엇보다 ‘블루 노트’에 정리된 사형수 윤수의 생애는 범죄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것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나 과정에 대해서, 범죄자 개인이 아니라 범죄를 만드는 사회구조에 대해서 좀더 근본적인 생각을 유발한다.

우연인지도 모르겠지만 공교롭게도 최근 사형제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신문기사나 방송 프로그램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사실 매체에서 전달하는 사형제도에 대한 문제점은 공지영의 소설에서 드러난 것과 적어도 사실과 논거의 측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공지영의 소설이 이러한 기사나 프로그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정서적 감응력’일 터인데 이것이야말로 공지영 작품의 대중성을 해명하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소설에서 이 정서적 감응력은 멜로드라마적인 형식을 통해 극단적으로 확산된다. 오빠들은 모두 검사, 의사, 교수이며 자신도 집안이 운영하는 학교의 여교수인 문유정은 세번째의 자살 기도 끝에 고모의 권유로 사형수 정윤수를 면회하게 된다. 처음에는 종교적 감화를 위선으로 치부하며 그 만남에 마지못해 참석했던 유정은 어느새 윤수의 고통과 소외에 연민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 그와 소통하고 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중반 이후부터 사형수와 부잣집 딸의 멜로드라마라는 틀을 지니게 되면서 격정적이고 가파른 감정의 파고를 표현한다. 사형수와 여교수의 사랑이라는 설정이 통속적이라거나 부자연스럽다거나 하는 것은 여기서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매개로 해서 흉악범 윤수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윤수를 발견하게 되고 그 역시 상처받고 고통받는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멜로드라마적 설정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아울러 어려서 사촌오빠에게 강간당하고 그 사실을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한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유정이 윤수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과정 역시 모든 인간은 상처 앞에서 평등하며 필요한 것은 이해와 공감과 위로라는 다소간은 종교적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문제는 윤수와 유정의 사랑으로 서사가 집중되는 과정에서 그 밖에 제기된 여러 문제들이 더는 진전되지 못하고 희석된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검사인 오빠가 제도로서만 사형을 대하는 태도를 향해 유정이 항변하는 장면은 윤수를 살리려는 유정의 감정적 절실성을 조명하는 데서 그치고 만다. 가족의 안녕을 위해 강간당한 유정을 외면했던 어머니를 용서하겠다는 유정의 절규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상처를 돌보지 않는 부르주아 가족들의 불안한 동거와 이기심이 더 해부될 수도 있을 터인데 역시, 윤수를 살리기 위해 자신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유정의 심리만이 그 장면에서 도드라진다. 게다가 유정의 상대가 되기 위해서 윤수는 나약하고 상처입었으나 근본은 선량한 영혼으로 그려지고, 더구나 그의 살인 역시 우발적이었을 뿐 아니라 그것조차도 누명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래서 사형수 윤수의 존재는 불행하였으나 선량한, 예외적인 개인으로 제한되어 버린다.

개인의 상처와 고통에 깊숙이 공감하고 그것에 연민과 위로를 보내는 작가의 감수성은 그러므로 언제나 불안한 접점에 서 있다. 그것은 차마 비판하기 힘들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곤혹이다. 공지영에 대해 말해야 할 때면 나는 항상 매우 곤란한 선택의 순간을 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 된다. 그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다소간은 과장된 자기연민이나, 적절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음에도 어느새 그것이 감성적 동일화와 위안효과로 귀결되어 버리는 과정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또한 공지영만큼 사회적 현실 속에서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해 내고 문제를 도발하는 작가도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제시된 사실들을 근거로 한다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지영을(혹은 공지영이 만들어낸 문학적 효과를) 옹호하는 쪽을 택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그 다음’에 관해서라면 나는 이 위대하고도 초라한 개인의 시대에, 그의 소설이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인 그 위태롭고도 절묘한 접점을 더 밀고 나가 주기를 기대하게 된다. 원래 무기란 치명적인 공격도구이면서 또한 안전한 보호막이기도 한 법이다.

 

필자는 경북대에서 ‘김남천 문학연구-리얼리즘의 주체적 재구성 과정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0년 창비신인평론상으로 등단했다. 문학평론집 ‘충돌하는 차이들의 심층’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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