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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혁명가의 도시
광주, 혁명가의 도시
  • 이중 前 숭실대 총장
  • 승인 2006.03.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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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중의 중국산책 2회

양계초는 ‘朝鮮亡國史略’이란 책과, ‘朝鮮哀詞史 五律24首’란 시를 썼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그는 조선이 망한 것은, 조선이 중국에 대한 전통적인 충성의 자세를 저버리고, 서방 세계, 특히 신흥 일본에 빌붙은 결과라고 했다. 다시 말해, 중국의 영향권 안에서 생존해야 할 한국이 중국을 버림으로써 전통적인 한반도 질서가 붕괴되었고, 이로 인하여 입은 한국인의 재앙은 결과적으로 자업자득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그도 당대의 최고 지식인답게, 한국의 망국 원인으로, 한국 내부의 치명적인 병폐와 제국주의 열강의 약육강식을 지적하고는 있지만, 중요하게는 한국이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결과라는 생각이 강했다.


고종 임금의 ‘황제’ 등극을 소재로 한 듯한, 다음과 같은 그의 시를 읽어보면 그의 한반도관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奇福無端至, 無胎受命符. / 夜郞能自大, 帝號若爲娛. / 誓廟絲綸誥, 交隣玉帛圖. / 千秋萬歲壽, 朝鮮正歡虞.
기이한 복이 까닭 없이 굴러온 듯, 아직은 수명부도 내리지 않았는데 / 야랑은 천하에 자신만이 제일인가 하면서, 제국의 국호에 그네들만 웃음 짓네 / 제왕의 칙서 문서 하늘에 알리고, 이웃에 구슬 비단 주고받았네 / 임금님의 만세 소리 높이 부르며, 조선은 독립했다 환호성 높네(김병민 옮김).

조선의 망국을 몹시 애통해 한 양계초라 할 수 있겠지만, 이 시를 보면 중국인의 오랜 우월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작자는 조선의 임금이 하늘(천자 즉 중국 황제)로부터 ‘수명부’를 받지도 않은 채, 즉 한국이 중국의 속국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승인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임의로 황제라 칭했다고 비아냥하고 있다. ‘야랑’은, 고대 중국의 서역에 있었던 작은 나라로, 그 나라 임금은 스스로 자기 나라가 천하에서 제일 크다고 뽐냈다는 고사가 있다. 중국과 대등한 관계임을 대내외에 선포한 ‘대한제국’을 중국 지식인 양계초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양계초는 한국이 망하는 것을 일본 망명 중에 지켜보았다. 1898년 무술변법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간 그는  청나라가 열강 앞에서 곤욕을 치르고, 한국이 청나라로부터 떨어져나가면서 동아시아권에 대변동이 생기고, 마침내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을 역사의 현장에서 목도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애통해 하고 충격을 받은 것은, 한국의 망국 그 자체라기 보다는, 한반도에 대한 지배세력 교체에 따르는 중화문명권의 위기와 몰락이었던 것이다.


강유위, 양계초가 청 왕조를 인정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한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손문은 청나라를 타도하고 새 중국을 건설하려는 혁명적 발상을 하고 있었다. 강유위와 손문은 앙숙이었다. 사사건건 대립하고 나라 안팎에서 두 파가 격돌했다. 손문의 국공합작으로 함께 손문의 국민당에 참여했던 장개석과 모택동 둘 다 혁명을 지향했다.

▲손문 ©

손문이 죽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이내 갈라졌으나, 그들의 승패는 한참 뒤인 1949년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명확해졌다. 장개석이 대만 섬으로 보따리를 쌌고, 10월 1일,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이 북경 정부 수립을 만천하에 선포했던 것이다. 그들 모두가 함께 북벌과 새 중국 건설에 열정을 쏟던 곳이 광주였다. 광주는 손문의 고향이자 청 왕조 초기에 마지막까지 만주족에 저항했던 고장이기도 하다.


북경에서 광주까지의 거리는 2천2백94킬로이다. 서울-부산 거리의 5배 가깝다. 광주까지 특급열차로 북경을 출발하면 꼬박 24시간이 걸린다. 열차 시간표엔 23시간 58분으로 돼있지만 2분을 넘기기 일쑤다. 200년대 초만 해도 그랬었다. 경제특구 심천이 바로 광주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청나라 말기의 태평천국 난도 광동에서 일어났다. 광동방언은 특이하며, 한때 광동방언으로 독자적인 방송을 한다는 말이 있어서 중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광주는 근대 중국혁명의 요람이다. 북경은 혁명을 최종적으로 수확한 도시이다. 혁명의 요람 광주에서 북경까지의 지리적 거리는 2천 킬로 남짓이지만, 역사적인 시간은 거의 40년이나 걸렸다. 1911년의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했을 때의 계산이다. 쑨원을 추대했던 신해혁명은 원세개의 배신과 폭주로 막을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손문의 광동시대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제1차 국공합작으로 표출되었다. 중국 현대사의 주역들인 손문, 장개석, 모택동, 주은래 등이 모두 1920년대 초반의 광동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총리 손문과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 정치부 주임 주은래가 한 울타리에 있었고, 모택동은 1924년 1월 광주에서 열린 중국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중앙집행위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잠시 농민운동강습소 소장과 국민당 선전부 대리 부장을 맡기도 했다. 손문을 정점으로 국민당의 장개석과 공산당의 모택동, 주은래가 광동 땅에서 청나라와 군벌 타도, 새 중국 건설이라는 한 목표 아래 잠시나마 뭉쳐있었다.     


전 미국 대통령 닉슨은 그의 저서 ‘지도자들’의 ‘주은래’ 편에서 “지난 반세기 중국에 관한 가장 큰 화제는 그 태반이 모택동, 주은래, 그리고 장개석 세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라고 적고 있다. 장개석은 1887년생, 모택동은 1893년생, 그리고 주은래는 1898년생으로 그들은 각각 여섯 살, 다섯 살 씩 터울이다. 장개석과 모택동, 모택동과 주은래, 주은래와 장개석, 이 세 사람의 물고 물린 인생역정은 기구하다. 그 인연도 끈질기다. 세 사람 다 19세기 말에 태어나서 20세기 중국의 변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8년 정월에 나는 북경 발, 광동 행 특급열차에 몸을 실었다. 먼저 그 유명한 황포군관학교를 찾기 위해서였다. 황포군교는 중국 근대혁명의 산실의 하나이다. 아침 8시에 북경을 떠났다가 이튿날 아침 8시 5분에 광주역에 내렸다. 1월 10일 아침이었다. 온기가 온몸에 와 닿았다. 겨울에서 곧바로 여름으로 질주한 셈이다. 그러나 정월이었는데도 광주엔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여름비가 남방의 더운 기온을 식혀주었다. 약간 쌀쌀하기까지 했다. 광주역에서 240선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 다시 43선 버스를 갈아타고 내린 곳이 魚珠부두였다. 부두 건너편에 황포도, 요즘 이름으론 장도(長洲島)란 섬이 보였다.


원래 중국엔 황포군관학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1924년 6월 개교할 때의 정식 이름은 “중국국민 육군군관학교”였다. 그 후 남경으로 옮겨가면서 “중앙군사정치학교”, “국민혁명군 군관학교”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분교도 몇 군데 있었다. 이 군관학교를 통 털어 약칭으로 “황포군교”라고 하는데, 물론 황포 섬에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황포군교 건물은 역사적인 유물로만 남아있다. 1938년에 일본 공군기의 폭격을 받아 내려앉았던 것을 1992년 대문을 복원하고, 26년에 교사 전체가 중건되었다.


건물 안엔 손 문 총리의 집무실과 교장실이 2층에, 정치부 주임실은 1층에, 옛날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었다. 자료전시실에 당시의 기록물과 참고 사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제1회 졸업생들에게 주어진 졸업증서가 재미있었다. 개교된 그해 11월 30일에 졸업식이 있었는데, ‘畢業證書’ 윗부분에 손문의 사진과, 그 양쪽으로 청천백일기가 그려져 있고, 총리 손문, 교장 蔣中正(장개석의 호), 당 대표 寥仲愷,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요즘도 중국에서는 ‘졸업’을 ‘필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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