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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신기관](프란시스베이컨 지음, 한길사)
[깊이읽기] [신기관](프란시스베이컨 지음, 한길사)
  • 최종덕 상지대 철학
  • 승인 2001.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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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과학탐구의 방법 : 귀납법과 배제법

추상적 관념과 선입관이나 편견 등을 비판하는 베이컨의 4 가지 정신의 우상, 즉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베이컨이 지적한 그런 우상 타파의 목소리를 그냥 철학개론서에 나오는 과거의 이야기로 들을 뿐 오늘의 문제에 투영하려는 진지한 관심은 더 희박해져 간다. 사회적 편견과 역사적 선입관의 문제에서 베이컨이 살았던 17세기 초반보다 지금이 더 나아졌다는 상황은 찾아볼 수 없는데도 말이다. 이 점에서 베이컨의 주요저작인 ‘노붐 오르가논’(Novum Organon)이 ‘신기관’이라는 제목으로 늦게나마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학문의 영역만이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권력을 바로잡는데 큰 의미가 있다. 원전 이해가 미흡한 우리 학계 풍토에서 베이컨 고전번역은 학문적 자극을 시추하는 일이기도 하다.

새로운 과학탐구의 방법 : 귀납법과 배제법


중세 때에 돼서야 수집된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을 비판적으로 패러디한 베이컨의 ‘노붐 오르가논’은 연역법에 근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인 과학방법론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과학탐구의 절차를 제시하였다. 그 새로운 방법의 주요 특징은 참된 귀납법과 배제법(method of exclusion)이었다. 올바른 학문탐구를 위하여 귀납의 방법을 동원하며 “자연과 실험의 박물지”(natural and experimental histories)를 새로이 편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런 작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먼저 인간의 감각과 사유 안에 도사려 있는 몇몇 우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형이상학적 제일원리들에 대하여 그 나름대로의 형성 동기를 인정하면서도 첫 단추부터 잘못 낀 과오라고 지적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자연학을 빙자한 극장의 우상과 종족의 우상이 섞여 있는 오류의 논리학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베이컨의 불만은 단순히 고전논리학 비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탐구를 해야만 하는 정당성과 학문적 근거에 있었다. 인간이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 상실한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아야만 한다는 도덕적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베이컨은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자연 속에 숨겨진 원리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아는 것이 힘”이라는 그의 유명한 명제가 등장하였다. 안다는 것은 자연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지성의 능력이다. 참된 지성은 단순히 실용성 추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넓은 시각과 긴 시선을 통해서 쓸데없는 논쟁거리만의 학문을 배제하는 그런 ‘먼’ 실용성에 있음을 아는 일, 그것이 바로 베이컨을 바로 읽는 길이기도 하다.


공/사립 학술재단에서 지원하는 번역사업 결과물을 볼 때, 나는 실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책임은 먼저 번역자에게 있지만, 결과물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지원 재단 측에도 많은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런 생각에서 나는 학진 지원으로 나온 이 번역서에 대한 서평을 부탁 받고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번역의 오류를 일부러 잡아내려고 꼼꼼히 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나의 오만으로 그치고 말았다. 고전 작품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이 원작 역시 문장이 매우 난해하고 탈문법적이어서 번역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다보면 무슨 얘기인지 종잡을 수 없게 되어, 나도 그러했듯이 원전을 대하는 초발심을 어느덧 잊고 이차문헌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원전의 번역이 진짜 충실하다면, 번역서를 통한 원전 읽기도 의미 있다.

수용성 높은 번역문장과 깊은 원전 이해


나는 이 책 분량의 3분의 1 정도를 원전과 일일이 대조했는데, 정말 근래에 보기 드문 훌륭한 번역이라고 확신한다. 오역이 없으며,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번역 문장의 수용성이 매우 뛰어나다. 더군다나 철학 전공이 아닌 번역자가 철학의 문제를 깊게 이해하고 번역을 했다는 점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내가 부끄럽기까지 하다. 단지 구체적인 자연학의 관찰사례들을 다루는 뒷부분에서 자연학 용어의 몇몇 오해의 여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기포를 해체하는 것”(뒤집어 싸는 것, 255쪽), “물체라도 뛰어넘어”(뚫고 들어가, 252쪽), “바퀴”(톱니바퀴), “자석의 공감”(친화성), “마술 실험”(마술 같은 실험) 등이다. 그러나 이런 실수조차도 매우 적으며, 읽기에 전혀 지장이 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비전공자도 읽을 수 있는 좋은 고전 번역을 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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