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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동향: 최종성 서울대 교수 ‘조선전기 무속 문화사’에서 주장
학술동향: 최종성 서울대 교수 ‘조선전기 무속 문화사’에서 주장
  • 신정민 기자
  • 승인 2006.03.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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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순간에 유교의 자리를 대신한 巫俗

한림대 한림과학원 산하 한국학연구소(소장 한영우)에서 학부생부터 원로연구자의 소통을 도모하고, 한국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학문의 장으로 2004년부터 기획한 콜로키움이 벌써 16회째 접어든다. 지난 8일 한림대 연암관에서 열린 콜로키움은 소장파 종교연구자인 최종성 서울대 교수의 ‘조선전기 무속 문화사’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유교문화 속에 놓인 무속문화의 실체와 위상을 점검하고, 別祈恩·기우제·巫醫 등을 통해 무속사와 무의 종교직능을 살폈다.


최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이기도 했던 이번 발표는, 조선조 유교가 정통론적 문화론을 견지해 闢異端論과 淫祀論으로 비유교 전통을 배척하지만, 위기시에 오히려 국행의례로 무속이 이용돼 유교문화의 반혼합주의 속에서 무속문화가 형성하는 모순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이날 최 교수는 한국종교사를 개관하면서 무속문화가 유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지만, 무속과 불교 관계만을 주목한 나머지 무속-유교가 종교문화를 변화시킨 주요 요인으로 인정받지 못해 학문적 영역에서 소외됐다는 지적을 시작으로 논의를 이끌었다. 무속과 유교가 한국종교사의 주요노선에서 벗어났더라도, 고매한 종교적 이상/대중의 뿌리깊은 종교적 정서, 공식종교/민속종교, 엘리트/대중, 구도적 고전문화/기복적인 열망의 관계충돌이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조선조 유교와 무속의 관계 연구가 필요하다고 최 교수는 강조한다.


최 교수는 학술·사상적으로 유교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벽이단론과 비유교문화의 기능과 공공성 차단을 위한 제도적인 힘을 구사하는 음사론으로 대별되는 유교의 반혼합주의 특성을 살피면서, ‘경국대전’등을 통해 유교의 강한 금단조처에도 위험스런 문화의 오염원으로 지목된 무속을 근절시킬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유교정신에 입각한 국가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위기의 순간에 무속은 국행차원에서 동원되거나 차용되는 모순을 보인다는 것. 이에 대해 최 교수는 고전, 고제, 구법을 존중하는 유교의 好古主義의 바탕으로 인해, 삼대와 구례에도 행해진 무속이 공식종교로 수용되고 공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위기의 순간에 유교가 갖지 못한 부분을 유서 깊은 무속이 자리를 메운 것.


이어 최 교수는 성수청의 주관 하에 산천에 국무당을 세우고 국무를 파견, 복을 기원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는 기존의 음사를 정비하지 못한 채 국가의 제장 조성사업이 이뤄졌기 때문에 무속의례인 별기은이 國祀와 병행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음서론에도 불구하고 관성적으로 지속되던 별기은은 중종과 명종 대에 이르러 유학자들의 정통론에 밀려 음지에서만 거행됐다고 주장한다.


▲ 단성향토문화원(회장 박영호) 주관으로 단성면 두악산(소금무지산)정상과 마당바위에서 열린 소금기우제. © 대전일보

별기은과 더불어 대표적인 무속의례인 기우제에 대해 최 교수는 하늘에 연민과 감동을 얻어 강우의 효과를 얻으려는 희생적 의례인 폭무의 형태와 폭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나타난 별기은 식의 산천기우에 대해 주목한다. 오랜 가뭄으로 인한 국난에 기우의 유혹을 떨칠 수 없었던 유교사회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조선전기에 성행했던 기우제는 비상시 실천할 수 있는 유교식 행동규범이 완비되면서 점차 공식성을 잃어갔다고 최 교수는 설명한다. 


이어 최 교수는 유교질서 속에서도 의약보다 의례적 치료가 선호되고 국왕의 치료까지 이어졌지만, 치병과 저주의 무속의례는 왕도의 신성화로 인해 18세기 공식적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신정민 기자 jm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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