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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 ‘한국사시민강좌’ 건국기 역사 재조명
동향: ‘한국사시민강좌’ 건국기 역사 재조명
  • 신정민 기자
  • 승인 2006.03.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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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다시 읽다

반년간지 ‘한국사시민강좌’ 제38호(일조각)가 ‘대한민국 건국사의 새로운 이해’라는 주제의 특집을 마련해 해방공간에서의 대한민국 건국과정과 주변정황을 다룬 8편의 논문을 실었다. 대부분의 논문은 기존의 수정주의 사관에 입각한 이승만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는 달리, 실증적 접근을 토대로 최근 두드러지는 탈수정주의적 입장을 보여준다.

차상철 충남대 교수(미국사)는 ‘미국의 대한정책, 1945~1948’라는 글을 통해 당시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변화에 대해 분석한다. 차 교수는 “루스벨트가 고안한 신탁통치안이 한국사회의 이념분쟁을 심화시켰고, 미국내 갈등을 초래해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 결렬의 근본요인으로 전쟁과 분단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차 교수는 “이러한 미국의 한국정책 실패가 결국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양하는 계기로 이어져,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소공동위원회의 쟁점과 결말’에서 이동현 건국대 교수(한국현대사)는 “해방과 함께 미·소는 이미 자국의 이익을 확보했기 때문에 ‘미소공동위원회’가 회담의 성공을 위한 자리보다는 결렬에 따른 책임전가를 위한 자리였다”고 분석한다.

남한이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전 이미 소련군정에서 북한에 독자적 기구를 설치하라는 지령이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는 이정식 펜실베니아대 명예교수(한국근대사)는 ‘이승만의 단독정부론 제기와 그 전개’에서 당위적 통일정부론으로 단독정부론의 이승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시대적 정황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혜안이라고 평가한다.

남한의 제헌국회 의원 선거는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이런 논란에 대해 황수익 서울대 교수(정치이론)는 서울과 미군정 중심사고에 편향된 채 연구가 이뤄졌던 한계라고 지적한다. 황 교수는 ‘5·10총선거 재조명’을 통해 “5·10선거 당시 이미 미·소의 지원 아래 남·북체제가 형성돼, 사실상 5·10선거는 분단체제를 공식화한 데 불과하며, 소련의 위성국가 건설을 위한 전략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어 황 교수는 “5·10총선은 남로당의 폭력적 반대와 관권의 개입이 있긴 했지만, 민의가 현저하게 왜곡된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미 분단체제를 공고화한 불행한 선거지만, 처음으로 국민이 참여한 중요한 선거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5·10총선거를 둘러싼 좌우익 간의 투쟁’에서 한용원 한국교원대 명예교수(한국정치)는 당시 2·7총파업사건, 제주 4·3사건, 여순 10·19사건 등을 살핌으로써 좌우익의 지형도를 그려낸다. 한 교수는 “2·7총파업을 통해 5·10선거 저지와 인공 수립을 지지한 좌파의 이중전략은 5·10선거 이후 4·3사건을 통해 정부전복과 인공 수립투쟁으로 전환시켜, 이를 10·19사건에서 본격화했다”고 좌익의 전략을 살피면서 “공산당의 친공세력 확대가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을 비롯해 주요인물들이 포섭돼 있어, 남한 내의 공산혁명 위협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한 수정론자 커밍스의 전제는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한국근대사)의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에서는 대한민국 헌법 제정과정에서의 공을 기존 학계에서 평가한 유진오에서 이승만으로 돌린다. 유 교수는 이승만의 활동으로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헌법제정 작업을 효율적으로 지도해 완료할 수 있었고, 제헌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첨가해 ‘대한민국’ 국호로 확정하고 단원제안과 대통령중심제안으로 구조를 설정한 점” 등을 들었다. 유 교수는 “40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훌륭한 헌법’을 만들 수 있는 이면에는 국회의장 이승만이 있었다”라고 주장한다.
신정민 기자 jm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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