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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국립중앙박물관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국립중앙박물관
  • 최승우
  • 승인 2022.07.18 0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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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416쪽

색다른 스토리텔링으로 만나는 국립중앙박물관
그 주인공은 금동반가사유상

이 책은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전시된 금동반가사유상 두 분과의 귀한 만남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감상하기 위한 탐구서이자 안내서이다. 박물관 마니아이자 역사 덕후인 황윤 작가는 오래도록 국립중앙박물관을 보는 자신만의 스토리텔링으로 ‘금(金)’을 주제로 한 관람을 즐겨왔다. 언젠가 국립중앙박물관을 주제로 책을 쓴다면 그 주인공은 당연히 금동반가사유상이라 생각했던 이유도 금과 예술, 불교의 집약체가 바로 ‘사유의 방’에 전시된 금동반가사유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두 점의 반가사유상을 만난다는 것이 단지 '사유의 방'이라는 공간에 국한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사유의 방’으로 다가가는 과정을 400페이지가 넘는 책에 담은 것은 두 점의 금동반가사유상을 제대로 만나기 위한 일종의 준비이자 예의다. 1300여 년 전에 등장한 반가사유상! 그리고 그것의 탄생을 위해 준비된 더 많은 시간을 추스르기에는 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지 모르나, ‘사유의 방’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관람자를 위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재밌고 뜻깊은 국립중앙박물관 여행을 위해 여러분을 초대한다.

사유의 방을 감상한다는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전체를 보는 것

‘사유의 방’으로 가는 길은 직진이 될 수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오르내리며 돌고 돌아 하나하나 확인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박물관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시간은 학습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국립중앙박물관 1층에서부터 3층을 꼼꼼히 오가며 청동과 금의 흐름에서부터 한반도를 둘러싼 국가 간 힘의 이동, 그리고 반가사유상의 내면에 깃든 불교의 역사와 형식 등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즐거움에 빠져든다.

그 시작은 국립중앙박물관 1층 구석기·신석기 전시실에서 시작되어 청동기, 고조선, 고구려 전시실로 이어진다. 청동으로 제작된 몸체에 금을 칠하여 완성시킨 반가사유상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한반도 내 청동과 금의 흐름을 보여준다.
고구려에서 백제로 이어지는 박물관의 동선을 무시하고 고구려에서 신라 전시실로 갔다가 다시 백제·가야로 넘어와 안내하는데, 고구려·백제·신라의 유물을 하나하나 비교하며 삼국과 중국을 둘러싼 외교력과 힘의 이동, 기술력과 심미안 등 다채로운 스토리텔링을 선보인다.
이어서 3층 불교 조각 전시실, 인도·동남아 전시실, 중앙아시아 전시실을 넘나들며 불교의 전파, 불교 세계관에서 미륵보살의 의미, 국가 지배에 있어 불교의 역할, 불상의 디자인적인 측면 등등 불교 불상에 관한 과히 총망라된 정보를 풀어낸다.

드디어 ‘사유의 방’.
우리는 두 점의 금동반가사유상이 품은 서사의 깊이와 조우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나는 고고학적 질문들

1. 같은 종류 국보들의 이름이 같아졌다
2021년 11월 19일을 기준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당시 순서대로 부여했던 지정 번호를 앞으로 표기하지 않도록 하는 ‘문화재보호법 시행령’과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이 시행되면서 ‘사유의 방’에 모셔진 두 반가사유상을 부르던 명칭 국보 78호와 국보 83호가 갑자기 사라짐으로 인해 둘다 국보 반가사유상이 되고 말았다.
지정 번호가 가치의 높고 낮음을 표시한 것이 아닌 지정된 순서를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가치 서열에 따른 순위로 오인되는 경향이 있다보니 과감히 없애기로 결정한 것인데, 이 책에서는 정부의 지침에 맞추어 가능한 한 지정 번호를 언급 안하는 방법으로 기존의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경우 ‘탑형보관 반가사유상’으로, 기존의 83호 반가사유상의 경우 ‘삼산관 반가사유상’으로 부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SNS를 통해 애칭을 공모했으나 끝내 대상을 정하지 못할 정도로 최종 당선작을 결정하지 못한 바 있는데, 우리 유물을 구분하고 친숙하게 부르는 개개의 이름을 갖도록 해결안이 나와야 한다.

2. 고조선을 지나 낙랑 전시실에서 발견한 화려한 옥벽과 허리띠
옥벽 및 여러 옥기와 철로 만든 검과 장신구가 발굴된 석암리 9호분. 그중에서도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라 부르는 국보 금제 허리띠는 세세한 조각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용 장식이 엄청난 공력으로 완성한 것을 넘어 하나의 세계관을 짜임새 있게 보여주는 것인데,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출토된 금제 띠고리와 유사하다.
고구려에 의해 낙랑이 추출된 후 낙랑인들은 중국으로 이주하기도 했지만 고구려에 편입하거나 백제 또는 일본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백제 근초고왕은 낙랑 태수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중요하게 여겼고 고대 한반도에서 낙랑은 단순히 한나라 군현이라는 의미를 넘어 중국과 연결되는 문화적 다리 이미지로서 존속함으로써 결코 부정적 이이지는 아니었다는 것. 그렇다면 고구려가 낙랑을 쫓아낸 후 그 이미지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변형하여 사용하고, 백제와 신라 또한 그 변형된 이미지를 사용한 점 역시 한반도의 승리한 역사가 만들어낸 여유 아닐까? 이제는 낙랑에 대한 그동안의 불편한 느낌을 일정 부분 지우고 낙랑을 한반도 역사의 흐름 중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 아닐까?

3. 출토 유물로 황남대총이 어느 왕과 왕비의 묘인지 추론 가능
황남대총의 신라 왕 무덤에서는 은관과 금동관 4개가, 황남대총의 왕비 무덤에서는 금관이 나왔다. 부부총인 황남대총 남분 즉 남성 묘에서 출토된 신라 유일의 은관은 고고학적 추론을 통해 이 묘가 어느 왕의 묘인지 추론이 가능하다. 북분인 왕비의 묘에서 출토된 금관이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실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녹각 디자인을 닮은 금관이기에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 조성 사이에 신라에 대단한 정치적인 변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은관은 고구려의 성향이 강한 디자인으로 신라 왕이 사용했었고, 이는 곧 고구려의 입장과 기준에서 부여된 물건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임을 보여준 것이다.

4. 국립중앙박물관 불교 조각 전시의 아쉬움
불교의 도입과 미륵 사상을 살피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3층으로 가면 한국의 불교 조각을 전시중인 조각·공예관이 있다. 여기서 금동으로 만든 부처 조각을 통해 불교문화가 도입된 삼국 시대의 모습을 살피는 것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중국, 일본, 인도 등 해외 유물을 전시한 세계문화관과 연계하여 보는 것이 중요한데, 이 분야 A급 문화재 수집이 잘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아쉬운 점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삼국 시대 불교 조각 이야기를 할 때 한반도에 영향을 준 인도, 중국 불교 조각을 직접 보면서 관찰해야 하는데, 인도전시실에 간다라 미술품이 여럿 전시되어 있지만 놀랍게도 부처 조각이 없다. 그러니까 깨진 부위로 머리나 몸통, 또는 작은 조각에서 등장하는 부처 말고, 전체적인 디자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큰 크기의 부처 조각이 없다. 큰 크기로는 오직 보살 조각만 3점 정도 있을 뿐이다. 보살이 중요하긴 하나 그래도 불교 조각의 꽃은 부처인데, 완전한 형태의 A급 부처 조각이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없다는 것은 큰 취약점이다.

중국 불교 조각도 마찬가지다. 중국 전시실에서 6세기 한반도 불상 디자인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중국 남북조시대 불교조각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7세기부터 통일신라까지 영향을 준 수나라, 당나라 불교 조각도 거의 찾을 수 없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이왕가박물관이 수집한 작품 몇 개만 있을 뿐인데, 그나마 1~2개를 제외하면 중요 부분이 깨지거나 질이 그다지 높지 않아 불상 디자인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반대로 일본 불교 조각이 있다면 한반도에서 영향을 받은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러한 전시를 관람함으로써 누구든지 자연스럽게 한반도를 넘어 세계사 속 한반도 역사를 머리에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런 부분이 여전히 매우 부족하다.
세계사 속에서 한국 유물의 가치를 증명해내야 한다. 이런 부분이 충분히 채워져야 비로소 국립중앙박물관의 세계적 경쟁력이 생겨나고, 더 나아가 한반도에 국한된 범위를 넘어 더 넓은 세계관을 키워주는 교육 역시 가능할 것이다.

5. 서울에 집중된 국보와 보물 문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현재 2층 ‘사유의 방’에 전시 중인 각기 82cm, 93.5cm의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2점 외에도 20~30cm 정도 크기의 금동반가사유상을 여러 점 소장하여 전시 중이다. 문제는 이들 금동 반가사유상의 경우 한반도 전역에서 A급만 골라 모았기에, 서울과 달리 지방 박물관에서는 수준급 금동반가사유상을 거의 만나볼 수가 없다. 오죽하면 국립경주박물관에도 경주 성건동에서 출토된 금동반가사유상을 포함하여 작은 크기의 금동 4점만 존재하며, 국립대구박물관에 15cm의 금동반가사유상이 2점 정도 있을 뿐이다. 즉, 유독 작거나 부서지거나 깨진 형태의 반가사유상만 지방에 있는 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주요 유물을 서울에 집중시킨 현 상황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있는 전쟁 등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미사일이라도 떨어지면 동산 형태의 국보, 보물 중 60~70%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번 금동반가사유상의 예처럼 대부분의 A급 유물을 서울에 집중시키는 것이 과연 먼 미래까지 안전하게 유물을 보존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볼 문제다. 조선 시대에 《조선왕조실록》을 평화 시기에 미리 여러 지역에 배분해둠으로써 임진왜란으로 수도를 포함한 전 국토가 참화를 경험했음에도 그 역사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단 전쟁이 아니더라도 유물에 대한 개별 파손은 지금도 종종 일어나고 있다. 2008년 국보 1호라 하여 누구나 중요한 유적으로 여겼던 숭례문 방화사건이 있었고, 해외의 예로는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의 1911년 도난 사건, 2022년에는 30대 남성이 모나리자를 향해 케이크를 던진 테러 사건, 2011년 이집트에서는 시위 과정에서 국립박물관이 털려 투탕카멘 금박 목상이 사라져 아직도 찾지 못한 상태이다. 무조건 다양한 예방만이 최선의 노력일 뿐이다.
삼국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국보 작품을 오직 우리 세대만 볼 것은 아니지 않은가? 1300여 년 전 작품을 볼 수 있는 우리처럼 1300년 뒤의 후손들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일 것이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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