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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어떻게 '열대'를 발명했는가
유럽은 어떻게 '열대'를 발명했는가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2.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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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적 정체성 형성에서의 風土의 역할: 熱帶의 역사지리학

▲유럽을 휩쓴 콜레라 때문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와 인도대륙의 풍토를 정복하지 못하면 큰일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 Cholera ward in Hamburg, 1892

한국 사람들은 사계가 뚜렷한 곳에 살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사등분되고 다시 입춘, 우수, 경칩, 청명, 입하로 세분화된 절기의 변화를 섬세하게 인지하고 그에 따른 문화를 발달시켜온 민족이라고 여겨져왔다. 이런 한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아프리카나 동남아 같은 열대지방은 '답답'해보이고, 일년 내내 날씨가 꾸물꾸물한 영국 같은 곳은 왠지 척척하고 음울해 보인다. 

소박한 한국인들은 이런 기후적 차이를 상대적 만족감으로 여기고 지나갈 뿐인데, 유럽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최근 이종찬 아주대 교수(醫史學)가 유럽의 정체성 형성에서 열대가 한 역할이 지대하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이 교수는 지난해 연말 발간된 서양사학회의 학술지 '서양사론' 제87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서구적 정체성과 제국주의라는 기존의 함수관계에서 '열대'라는 매개변수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서구적 정체성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구와 열대가 도대체 어떤 관계에 놓인 것이길래….  

사실 이 교수의 논문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근대성 담론의 하위분과쯤 되는 '위생담론'의 자연과학적, 역사지리적 확장이다. 그는 서구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풍토(climates, 기후·기상·토질·지형·경관 등의 총칭)의 역할이 무엇이었나를 분석하려고 한다. 이것은 "과도한 역사주의가 생물지리적, 공간적 상상력을 억압하고 주변화하는 상황에서 열대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인식을 가능케 해줄 것"이라고 그 의의를 밝히고 있다.

해박한 역사, 인류학, 문학, 의학 관련 지식을 갖춘 이 교수는 히포크라테스와 헤로도투스를 불러온다. 그 둘이 갈라지는 지점은 바로 '풍토'인데 히포크라테스는 풍토를 사람들의 신체적, 도덕적 동질성과 차이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보았다. "유럽사람들은 신장과 체형이 서로 다르다. 유럽의 기후가 변화가 매우 심해 여름이 매우 덥고 겨울이 아주 추우며, 비가 많이 내리고 나면 건조상태가 오래 지속돼 아시아 사람들에 비해 체형변화가 심하다"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면 그렇다.

히포크라테스의 이런 생각은 의사의 아들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는 "한대지방과 유럽에 사는 이들은 용기는 충만하나 지성과 기술이 부족한다. 아시아는 그 반대다. 하지만 그 중간에 위치한 그리스는 용감한 동시에 지성도 겸비했다"는 식의 인종론을 펼쳤다.

이렇듯 유럽과 아시아를 대립적 관계로 파악하는, 서구적 정체성의 역사적 기원은 인종에 대한 '히포'와 '아리'의 풍토적 사고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

제국주의 시기에 오면 이러한 생각은 의학적 뒷받침을 받게 된다.  1300년대에서 시작해 1850년대에 이르는 '소빙하기'가 끝난 후 세계는 비로소 지금과 같은 풍토를 갖추게 됐다. 그 전에 유럽 사람들은 매우 춥게 지냈다는 것이 이 교수가 주목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따뜻한 아프리카나 인도 같은 대륙으로의 여행이 많아지고, 이 여행이 이주와 정착으로 이어지면서 비로소 두 대륙은 실질적인 '풍토의 차이'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먼저 무수히 많은 유럽인들이 풍토병으로 죽어나갔다. 인도에선 한해에 1백30만명이 말라리아로 죽기도 하고, 그 때 인도 육군의 30만명 중 10만명이 병원으로 후송됐다. 콜레라, 말라리아, 한센병, 황열병, 뎅기열, 인플루엔자, 각기병 등 수많은 전염병들로 인해 유럽인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이 시기 작품활동을 펼친 루이 페리디낭 셀린느는 소설 '밤 끝으로의 여행'(이형식 옮김, 동문선 刊)이란 소설에서 "어둠이 내려앉기가 무섭게 그 어둠을 모기떼가 점령해버린다. 둘, 혹은 백이 아니라 수 兆에 이르는 모기들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이 종족 보존을 위한 하나의 진정한 과업이다"라고 묘사하며 당시 식민지 경영자들의 지배이념을 대변했다.

당시 정치인들은 죽을 맛이었다. 인도에 병사 하나를 보내는데 1백파운드나 드는데, 7만명 파견병 중 매년 4천명 이상이 죽으니 영국은 질병으로만 매년 60만 파운드에 가까운 손실을 본 것이다. 따라서 "사망률이 높은 열대의 풍토에 적응하지 않으면 열대를 문명화하거나 식민화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때부터 유럽인들에게 열대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풍토로 파악되지 않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유럽 제국주의가 한창일 때는 영국인 의사 중 20%인 6천명이 열대에서 근무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당시 영국 식민성 장관 챔벌린이 "누구든지 유럽인들이 열대 풍토를 식민화할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열대로 가서 이들 질병을 연구하라고 말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은 결과일까.

아무튼 이 때부터 위생적이기 때문에 도덕적이며, 깨끗함은 사회적 질서의 잣대가 되기 시작했다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열대의 풍토병은 "신체적 불결, 정신적 광기, 도덕적 타락의 신호"로 여겨졌으며, 지리적 공간으로서의 열대는 도덕적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고, "서구:열대=깨끗함:불결함=문명:야만"의 서구적 정체성의 대립구도도 형성되었다는 것.

이런 과정 속에서 이 교수는 '면역'과 서구정체성을 곁다리 안주삼아 논한다. 파스퇴르의 미생물학, 코흐의 세균학, 메치니코프의 면역학이 이 과정에서 큰 활약을 한 것이다. 코흐는 실험실에 열대를 과학적으로 재현해 '결핵균'을 발견했고, 이것으로 인해 열대의 식민화는 '풍토병 때문에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에서 '가능한 일'로 돌아섰다. 기고만장해진 서구 의학자들, 특히 당시 영국 최고의 열대의학 전문가로서 열대의 위생과 질병을 담당하는 행정부서의 최고책인 해럴드 스콧은 '열대의학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에 이르렀다.

"인도의 풍토는 腹部 내의 질병을 유럽의 풍토는 胸部의 질병을 만드는 데 강력하게 작용한다. 지구가 자오선에 의해 동서양으로 구분되듯, 인체의 복부와 흉부는 횡격막에 의해 나뉜다."

결핵과 질병은 흉부에서 발생하며, 콜레라 같은 전염병은 복부에서 발생한다는 병리적 현상을 교묘하게도 상하의 개념으로 바꾸어 서양과 동양을 대비시키는 데 적용하고 있다고 이 교수는 비판한다. 하지만 이것은 의학사적 사실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인도에서 발생해 비엔나까지 휩쓸어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로 하여금 "전세계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번지는 어떤 전무후무하고 무시무시한 전염병의 희생물이 되어야 할 운명에 놓여있는 꿈을 꾸었다"라는 이미지를 낳은 인도의 콜레라가 '전염병'의 아시아적 기원을 확대재생산하는 데 이용되었다. 하지만 서양 사학자들은 1870년대에 서구에서 무려 5십만명의 사망자를 초래한 '천연두'는 잘 언급하지 않는데, 이 교수는 미국 최고의 의사학자인 찰스 로젠버그의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인용한다.

영국의 사례를 주로 보여준 이 교수는 프랑스, 독일도 이와 마찬가지였다고 정리하면서 당시 유럽이 영토확장에 열대에 대한 생물지리학적 지식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지식은 당시 창작된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데도 필수적이라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가령 고갱의 예를 든다. "고갱이 묘사하려 했던 것은 타이티의 여인과 풍경에 대한 사실적 모습이 아니라, 서구 르네상스 문화에 굴절된 에로스에 대한 미학적 형상화"였다는 것이 그의 생각. 고갱에게 타이티 섬은 서구 르네상스의 예술 세계를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미학적 공간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열대에 관한 풍경은 서구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추구하였던 서구문학과 미술에서 미학적 重心을 이루어왔다고 이 교수는 결론을 짓는다.

이종찬 교수의 논문은 기본적으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구성체계를 닮아있다. 하지만 그는 사이드가 생물학에 무지해 '지리'를 '영토'와 거의 일치되게 좁게 여김으로써, 당시 아프리카 등에 파견된 의사들이 열대풍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을 덧붙이고 있다.

하지만 최근 그리스 문명의 '독창성'은 그리스에 대한 아프리카의 영향을 은폐한 독창성이라는 주장을 담은 '블랙 아테나'(마틴 버낼 지음, 오홍식 옮김, 소나무 刊)라는 책도 출간됐듯, 서구문명과 그 대타적 존재인 비서구의 '동시발명'에 대한 이러저러한 지적들은 말은 맞지만 너무 과잉생산되고 있으며 너무 많은 곳에 적용되고 있다. 주체와 타자라는 인식론적 지배구도는 거기에 맞는 역사적 사실만 추종함으로써 또다른 편견을 낳을 수 있다는 것도 이제는 함께 고려되어야 할 시점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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