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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의역이 아니라 ‘직역’이 필요하다
번역, 의역이 아니라 ‘직역’이 필요하다
  • 이정서
  • 승인 2022.06.09 0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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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번역의 문제

저자가 쓴 그대로 문법에 맞게 번역하는 일
과연 특별한 원칙을 지닌 또 다른 의역일까

2016년 한강 씨가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을 수상했을 때의 일이다. 시상식장에서 한국문학의 신비함과 잠재력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에는 카뮈 같은 작가가 여럿 있을 것 같다”라는 말이 나왔다. 한 기자가 그 말을 받아 “한강 씨의 작품은 국내 독자들에게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며 마치 카뮈가 그랬듯 한강 씨의 작품이 난해한 측면이 있어 상을 받은 것처럼 기사를 썼다. 『채식주의자』(2007)가 어떻게 난해한 소설이라 할 수 있을까? 

 

이정서 번역가가 번역한 책들이다. 그는 국내 번역의 문제점에 대해 직역을 강조한다. 

그 기사를 보면서, 우리가 난해하다고 알고 있는 카뮈 『이방인』은 사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하자 나를 무지몽매한 이방인 취급하던 모 기자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 역시 저 기자처럼 『이방인』을 철저히 난해한 작품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은 결코 난해한 소설이 아니다. 내 번역서를 읽고 『이방인』을 난해하다고 하는 독자를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이런 예는 한둘이 아니다.

『어린 왕자』를 번역 출간했을 때는, 한 기자가 이런 기사를 썼다. “번역의 세계에서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은 “원칙은 없다”는 것이다. 창작에 원칙이 없듯이 번역도 문법의 오류 외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중략) 최근 번역가 이정서씨가 펴낸 ‘어린 왕자’(새움)는 이런 면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지난해 알베르 카뮈 ‘이방인’ 번역본을 내며 기존의 번역들을 오역이라고 주장해 말거리를 양산했던 이 씨는 이번에도 책 표지에 ‘우리가 만난 어린 왕자는 진짜 ‘어린 왕자’였을까?’란 문구를 박아 넣으며 기존 번역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어린 왕자와 꽃이 처음 만났을 때 주고 받는 “안녕”은 “좋은 아침”으로 바뀌어야 한다. 시간 정보를 가린다는 이유다. 존대의 여부도 문제 삼는다.”

나는 『어린 왕자』에서의 인사말은 시간적 배경을 설명하는 장치로서 쓰인 것이니 원래 그대로 그 말에 시간성을 살려 번역해 주어야 하며, ‘어린 왕자’의 어투 역시 존칭을 위해 작가가 프랑스어 ‘Tu(너는)’와 ‘Vous(당신은)’를 이용해 분명히 구분해 쓰고 있으니 역자 임의로 ‘의역’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던 것인데, 기자는 오해했던 것이다.

기자가 내 말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다음 말로도 드러난다. “창작에 원칙이 없듯이 번역도 문법의 오류 외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바로 그렇다. 나는 일관되게 저자가 쓴 그대로 문법에 맞는 번역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인데, 기자는 마치 내가 무슨 특별한 ‘원칙’을 가진, 즉 또 하나의 ‘의역’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의역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원래 작가가 쓴 단어 하나도 의역하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잘 드러난다. 『1984』에 사용된 ‘사고범죄(crimethink)’, ‘정통섹스(goodsex)’ 등은 기존 영어가 아니라 임의로 만들어진 단어들이다. 신어(Newspeak)라 불리는 저 단어들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작품 말미의 ‘보유(appendix)’를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 그에 따르면 ‘goodsex’는 기존의 ‘좋은/멋진’ 섹스의 의미가 아니라 정통적인 섹스, 즉 오로지 출산을 위한 목적으로서의 섹스행위를 말한다. ‘Thought Police’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 번역서는 이것을 ‘지레짐작’해서 ‘사상(思想)경찰’로 번역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사고(思考)경찰’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생각, 사고까지 통제하려는 빅 브라더 시대의 전위대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 사람들이 ‘바르게 사유하는 것’ 자체를 ‘범죄행위’로 보고 통제한다는 의미에서 쓴 것이다.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요소인 ‘이중사고(doublethink)’로 이어지는 것이고. 이렇듯 사실은 단어 하나도 원래 의미를 잃으면 작품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1984』를 “‘빅 브라더의 세계 지배’를 암울한 결말로 다룬 작품”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빅 브라더 정치가 실패한 이후 과거를 돌아보며 들려주는 이야기’(미국 펭귄북스판 『1984』의 작품 해설에서 토마스 핀천이 한 말)이다.  

이런 모든 오해가 결국은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우리 번역출판의 역사는 100년이 되지 않는다. 그간 우리는 번역은 직역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배우고 가르쳤다. 이 고정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선은 전문가들이 나서서 ‘의역’ 중심이었던 우리의 번역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정서 번역가

2014년 기존 알베르 카뮈 『이방인』의 오역을 지적하는 새로운 번역서를 내놓으며 학계에 충격을 가져왔다. 이외에도 『어린 왕자』, 『위대한 개츠비』, 『노인과 바다』, 『1984』, 『동물농장』, 『투명인간』 등을 번역하며 기존 번역들의 오역과 표절을 지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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