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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라 장인 구진천(仇珍川)의 조국
기고: 신라 장인 구진천(仇珍川)의 조국
  • 김창석 강원대
  • 승인 2005.12.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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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라

김창석 (강원대 역사교육과 조교수 / 한국고대사 전공)
 

▲구진천의 천보노. ©
신라 사람 구진천은 무기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그가 만든 쇠뇌(석궁처럼 방아쇠 장치를 달아서 큰 화살을 멀리 쏠 수 있게 만든 활)는 1천 보(步) 즉 1km가 넘게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다.

그런데 669년 겨울 신라에 온 당나라 사신은 황제의 명령이라 하여 그를 당으로 데려가 쇠뇌를 만들게 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 정복전을 치르면서 구진천이 만든 쇠뇌의 위력을 실감한 터였다.

더욱이 당 고종은 부왕(父王)과 김춘추의 약조를 무시하고 백제, 고구려 땅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신라까지 손아귀에 넣고자 했다. 그리고 신라가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일전을 벌일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신라의 쇠뇌는 가장 두렵고 탐나는 무기였다. 구진천을 초빙해 그 기술의 비밀을 알면 신라마저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데도 첨단 무기로 유용하게 쓸 수 있으리라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당나라에 가서 만든 쇠뇌는 겨우 40m밖에 나가지 않았다. 고종이 그 이유를 묻자 현지의 재료가 불량해서라고 대답했다. 당나라는 다시 신라에서 재료를 구해 와서 고쳐 만들도록 했다. 이번에는 80m 정도 화살이 날아갔다. 구진천은 이번에는 신라에서 나무를 가져오면서 바다를 건넜기 때문에 나무에 습기가 배어서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고종은 화가 치밀었다. 구진천이 한 말은 핑계에 불과하고 일부러 엉터리 쇠뇌를 만든게 아닌가 의심했다. 잘 만들면 큰 상을 내리고, 만약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무거운 벌을 내리겠다고 위협까지 했지만 그는 결코 그 재주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고종의 의심대로 구진천은 일부러 성능 좋은 무기를 만들지 않았다. 그럴 경우 당나라가 신라를 치는데 자기가 만든 쇠뇌를 이용할 것이 불 보듯 하지 않은가? 실제로 이어 벌어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데는 구진천의 애국심과 불굴의 의지도 한 몫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외국에서 탐낼 정도로 뛰어난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었으므로, 조국의 안위와 개인의 편안한 삶을 놓고 고민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조국을 선택했다. 세계 최강의 제국 당나라에 가서, 그것도 황제의 명령과 위협, 회유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삼국시대와 지금의 국제 질서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현대 세계에서도 국제화의 화려한 수사 뒤편에서는 국가 단위의 이해관계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 또한 엄중한 현실이다. 학자가 진리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 인류에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지만, 그 통로와 형식은 아직 국가와 민족의 틀을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전통적인 국가의 틀이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일부 지역에 국한된 현상일 뿐이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황우석 교수의 말에 대중이 호응한 것도 단순한 감정 차원이 아니라 세계화의 격류 속에 존재의 무게 중심이 흔들리고 삶이 위협받는 현실 속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본다.

 황교수의 연구 성과에 대한 검증 결과와는 별개로, 첨단 과학기술 확보를 국가적 전략으로 삼는 냉엄한 현실과 학자의 존립 근거에 대한 그의 지적은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마저 대중 영합주의라고 매도하고 내치는 것은 비약이고 너무 많은 것을 잃는 것이다. 국가 단위의 국제질서가 존속하는 한 구진천의 국가의식, 조국애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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