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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향: 佛, 들뢰즈 10주기 맞아 논쟁 활발
해외동향: 佛, 들뢰즈 10주기 맞아 논쟁 활발
  • 양창렬 프랑스통신원
  • 승인 2005.12.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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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엘리트주의적"…정치의 不在 지적도

들뢰즈가 1995년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한지 10년이 지났다. 그에 대한 추모 혹은 기억은 그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을 도구상자 삼아 끊임없이 개념들, 기능들, 지각들을 발명해내는 일일 것이다.

비록 들뢰즈 자신은 토론에 대한 취미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의 철학이 빚어낸 사건 그리고 효과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에 대해 ‘말하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번 기사에서는 프랑스에서 진행 중인 들뢰즈 관련 논쟁들 중 두 가지를 간략히 조망해보고자 한다.

들뢰즈와 정신분석학

지난 9월 출간된 모니크 다비드-메나르드의 ‘들뢰즈와 정신분석학 : 말다툼’은 철학과 정신분석학 사이의 미묘한 "트집 관계"를 들뢰즈의 철학 속에서 살펴보고, 철학에서 정신분석학의 자리 문제를 다룬다.

그녀가 지적하듯이, 실천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이 뭔가 작동되지 않는 것('부정적인 것'), 즉 증상이나 징후에서 출발하는 반면, 사유로서의 들뢰즈의 '철학'이 ‘긍정적인 것’에만 주목하는 한, 이 둘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특히 "슬픈 정념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그녀의 질문은 정신분석학과 스피노자-들뢰즈 사이의 쟁점을 직접적으로 제기한다. 이는 부정적인 것에 주목하는 정신분석학과 긍정적인 것에 주목하는 철학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을 환기시키며, 헤겔 변증법과 들뢰즈의 반변증법 논쟁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이 큰 문제를 모두 다루기보다는 '슬픈 정념'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본 논쟁의 관건은 정신분석학이 제기하는 "슬픈 정념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스피노자-들뢰즈의 입장에서는 잘못 제기된 문제라는 데 있다.

 
첫째, 스피노자-들뢰즈에게 정념은 신체들이나 물체들의 마주침의 효과 및 그에 대한 적합한 혹은 부적합한 인식에 해당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실천 철학’에서, 우리 신체와 부합하지 않는 신체와 마주치는 가운데 나오는 슬픈 정념 - 그것은 우리를 파괴하거나 고통스럽게 하는 것에 대한 부적합한 관념에 불과하다 - 에서는 공통 개념이 나올 수 없으며, 후자는 오로지 기쁜 정념 - 그것은 우리가 행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증가시킨다 - 으로부터만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들뢰즈의 처방은 좋은 마주침을 선별, 조직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

둘째, 정념은 마치 사건과도 같아서 (다른 개체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것 혹은 (우리의 신체에 나타나는) 표면-효과이지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어떤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슬프다 혹은 기쁘다고 말하거나 혹은 그것들이 우리의 얼굴 혹은 몸을 가로질러 표현될 뿐이다. 그러므로 슬픈 정념 자체를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원인이 되는 신체들과 그들간의 마주침을 어떻게 새로이 조직하느냐가 문제다. 더불어, 정신분석학이 가정하는 인간주의는 정서(affect)를 사물, 개체의 차원에서 고려하는 스피노자주의에는 낯선 것이다. 스피노자-들뢰즈에게는 오히려 동물 행동학, 나아가 개체 행동학이 중요하다.

결국, 들뢰즈의 철학적 사유 자체에 정신분석학이 참고 대상이었느냐의 여부를 떠나, 그의 철학 자체와 정신분석학을 화해시키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들뢰즈와 정치

2003년에 5월 출간된 ‘들뢰즈와 민주주의의 문제’에서 필립 멍그는 들뢰즈의 철학 자체에 고유한 의미로서의 '정치'는 부재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주장은 올해 초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그리고 정치’ 콜로키움에서 다시 한 번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열기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논점을 두 가지만 간략히 언급해보자.

첫째, ‘대담’에 등장하는 "생성과 역사의 구분"은 ‘의미의 논리’에서 들뢰즈가 스토아학파를 따라 발전시킨 순수 사건과 사물의 상태 사이의 구분과 유사하다. 이는 현재의 어떤 역사적 순간에도 존재하지 않고, 항상-이미 지나갔거나 도래할 것으로서의 혁명, 순수 사건으로서의 혁명[아이온의 평면]과 신체 안에 이 혁명을 등록, 체화해야할 필요성[크로노스의 평면] 사이의 아포리아로 이어진다. 과연 이 두 평면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둘째, 들뢰즈가 강조하는 소수, 미시 정치에 대한 파악이 특정한 지식인의 전유물인 듯 보이는 ‘지성’의 질서에 속하는 한, 그의 정치는 엘리트주의적이자 아방가르드적이다. 덧붙여 토론에 대한 들뢰즈의 혐오는 곧 바로 '토론'을 원리로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와 연결된다. 그리고 들뢰즈는 민주주의 혹은 정치에 대한 고민을 윤리에 대한 논의로 환원한다.

궁극적으로 멍그는 '역사로부터 벗어나는 생성'에 대한 예찬과 노마디즘에 대한 피상적 이해가 낭만주의적인 치기로 흐르고 있으며, 오히려 연대와 합의에 기초한 정치적인 내재성의 평면, 즉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가 제기한 생성과 역사의 구분 문제는 슬라보이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들’이나 ‘지젝과의 대화’ 등에서 들뢰즈의 이론 자체 내의 아포리아로 취급된 바 있다. 신체가 먼저인가, 비인격적이고 잠재적인 사건들, 흐름들, 생성들이 먼저인가. 사건은 신체들의 비물질적 효과인가[‘의미의 논리’의 유물론] 아니면 신체야말로 생성 혹은 사건의 순수 흐름의 생산물[‘안티-오이디푸스’의 관념론]에 불과한 것인가. 또한 들뢰즈(철학)의 반민주주의 성향에 대한 혐의 제기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토론인 이종영 교수의 ‘들뢰즈-가타리의 파시즘’론 혹은 바디우의 들뢰즈 비판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역시 이런 문제들은 들뢰즈 연구가들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물론 마놀라 안토니올리가 최근 ‘들뢰즈, 철학적 유산’에 기고한 글인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적 기계화’에서 말하듯이, 리비도적인 에너지 혹은 생성들로부터 '순수' 정치 영역을 분리해내려는 시도는 환상에 불과하며, 새로운 정치적 기획은 오히려 생산 양식, 행동 형식, 감수성, 삶의 양식, 기술, 환경, 제도, 사회에 대한 관계의 변화를 가정한다. 물론 이것은 들뢰즈를 ‘반복하는’ 답변이기는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충분히 보여주지는 못한다. 들뢰즈가 ‘대담’에서 말한 "자본주의 및 그것의 발전 과정에 주목하는 정치철학" 연구야말로 그를 읽는 자들에게 남겨진 과제 중 하나이며, 네그리와 하트의 작업을 비롯한 자율주의의 자본주의 분석 및 삶정치론은 그러한 실천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후자는 또한 멍그가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간접적인 답을 제공하기도 한다.

다중이 공유하고 있는 일반지성, 언어 능력, 이동성 등에 기초하여, 공통적인 것 - 그것은 동일성이나 보편성, 더군다나 파시즘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것은 서로 부합하는 신체들 간의 즐거운 마주침의 조직화에 가깝다 - 의 구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성'이 소수 전위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기존 민족-국가들 사이의 경계의 와해 및 이주 노동자들의 통제 불가능한 흐름에 대한 착목은 포획이나 제도에 대한 탈주, 생성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라는 고유하게 들뢰즈적인 관념을 계승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고유하게 정치적인 공간이 부재하는 현 상황에서, 정치적 문제는 존재 방식을 어떻게 재구성하느냐라는 윤리적인 기획의 차원에 접속되어야 한다. 그런 한에서 삶권력에 대한 분석 및 삶정치에 대한 모색은 그것이 들뢰즈-가타리 정치철학의 嫡子이냐 아니냐의 여부와 무관하게 구체적이고 독특한 가치를 지닌다.

위 두 논쟁에서 공통되게 발견되는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언급한 내재성의 평면의 구성 요소인 철학(개념), 과학(기능), 예술(지각)에 왜 정신분석학이나 정치는 추가되어서는 안 되느냐 혹은 왜 이 마지막 둘은 철학에 사유 거리를 제공하지 못하느냐라는 정당한 문제제기다. 그러나 그 둘을 덧붙인다면 우리는 바디우의 철학의 조건들 - 정치, 과학(수학), 사랑, 예술(시) - 이나 그 밖의 전혀 다른 철학을 만들어낼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은 더 이상 들뢰즈의 철학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데 들뢰즈의 개념들이 도구 상자로 쓰였다면 그것도 또한 기쁜 일이 아닐까.

양창렬 / 프랑스 통신원·파리 8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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