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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여와 잉여
잔여와 잉여
  • 최승우
  • 승인 2022.04.20 14: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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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영 지음 | 소명출판 | 512쪽

체제 변동과 공간 재편
이 책은 제국-식민지 체제에서 냉전-분단 체제에 이르기까지 체제 변동 과정 속에서 한국의 공간 질서가 재편된 양상에 주목했다. 1910년 한일병합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한 근대 한국은 1930년대 이후 제국 일본의 동아시아 지역으로의 지리적·문화적 팽창 과정 속에서 외지 식민지 지방으로서의 위상을 보다 강제 받았고, 이후 식민지 말 전시총동원 체제기 병참기지로서 재정위되면서 전쟁 수행을 위한 동원의 논리와 문법에 포섭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제국 일본의 패전과 식민지 조선의 해방은 이와 같은 제국-식민지 체제의 붕괴를 낳았다. 이후 탈식민화의 기치와 민족국가 건설의 움직임 속에서 해방 조선은 새로운 공간 질서를 구축해갔지만, 미소군의 남북한 분할 점령과 통치, 1948년 단독정부의 수립을 통해 38선을 경계선으로 하는 적대적 이념 공간을 창출했다. 이는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 세계적 냉전 질서 하 남북한의 분단 체제의 고착화로 이어졌고, 한반도를 양분하는 공간 질서의 강고화를 낳았다.

물론 체제의 실정성을 강화하는 공간 질서의 재편 과정 속에서도 그러한 체제에 포섭/배제되는 개인들의 실천을 통해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회적 공간들이 생산되고 경합하기도 하였다. 이 책의 논의를 통해 근대 이후 체제 변동에 따른 공간 재편, 그리고 그것들이 인간 삶의 조건들로 작동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동하는 주체의 수행성
인간은 끊임없이 이동의 과정 중에 있다. 이동은 자아를 넘어 세계를 인식하고, 감각하며, 세계 속의 존재로서 나를 구축하기 위한 핵심적인 방편이다.

문명개화의 사명을 가지고 서양으로 향했던 조선의 청년들, 제국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되었던 식민지 조선인들, 해방의 감격 속에서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돌아왔던 조선인들, 좌우익의 이념공간의 대립 속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했던 해방 청년들, 한국전쟁의 시공 속에서 생존을 위해 월남하거나 피난길에 올랐던 이름 없는 자들, 전후 폐허의 절망과 재건의 움직임 속에서 처절한 삶의 흔적을 남긴 자들, 그들은 모두 체제 변동과 공간 질서의 재편 과정 속에서 살기 위해 이동했다.

그때 체제의 실정성을 강화하기 위한 공간 질서의 재편은 이와 같은 개인들의 이동의 조건과 문법, 형식들을 창출하였다. 그리하여 개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관통한 공간 질서 속에서 삶의 조건들을 마련하고, 자기 내면의 욕망을 발견하였으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근현대소설에 나타난 이동하는 주체의 수행적 과정을 통해 그러한 움직임이 단지 체제의 질서와 문법을 체화하거나 공간 질서가 마련한 이동성으로만 수렴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개인들은 체제 변동에 따른 공간 재편 과정 속에서 그러한 공간 질서의 논리와 문법을 넘어서는 이동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 책의 논의를 통해 이동하는 주체의 수행성이 갖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체제-공간-이동의 서사적 상상력
문학은 체제의 실정성이나 공간 질서를 반영하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문학은 체제의 질서와 문법이 마련한 인간 삶의 조건들이나 재편된 공간 질서가 구획한 경계들이 갖는 상징질서에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서사 형식으로서 소설은 서사성 구축 과정에서 체제의 실정성이나 공간 권력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체제와 공간 질서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틈을 제시한다.

자기를 재정립하기 위해 부단히 이동하는 주체의 분열과 불안의 흔적들을 산포시키는 한편, 이동 과정의 비가시화·축약·과잉 등을 통해 통제와 금기, 억압과 배제의 경계 긋기에 대해 소설은 서사적으로 응수한다. 그것은 정책과 제도, 관습이 정당화하는 이동의 조건과 문법, 형식들을 비판적으로 재인식하게 하고, 나아가 새로운 이동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근현대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서사적 상상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소설들을 통해 근대 이후 체제 변동과 공간 재편 과정 속에서 이동했던 개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둘러싼 경계 너머를 꿈꾸고 욕망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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