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한국인의 그림자다. 어딜 가도 따라다닌다. 지난 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라는 ‘태양’이 하늘로 솟아오르면서 박정희의 음영은 더욱 짙어졌다. 박정희는 광복60주년을 맞아 올 한해 유난히 부각됐다.
▲조희연 교수 © |
박정희 시대에 대한 조명은 연말이 돼도 식을 줄 몰랐다. 지난 10월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가 ‘유신과 중화학공업-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일조각 刊)이라는 논쟁적인 저서를 펴냈다.
이 책은 박정희에 대한 평전작업을 베이스에 깔면서 그의 중화학정책을 가능케했던 상공부 테크노크라트의 존재를 새롭게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즉, 박정희가 기술관료의 자발적 충성에 의해 뒷받침된 경제근대화를 이룩했다는 주장이었다.
그 한달 뒤 한국학술단체협의회가 ‘해방 60년의 한국사회’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면서 박정희 시대 평가논의가 재연되기도 했다. 여기선 조희연 교수가 임지현·이영훈 두 교수를 반박해 논쟁의 불씨를 다시 지폈다. 특히 이영훈 교수에 대해서는 “식민지시대에 대해선 실증적이더니, 박정희 시대로 넘어오면 전혀 그렇지 않다”라고 신랄히 비판했다.
그 며칠 뒤 역사문제연구소의 ‘국민교육헌장 연구’ 심포지엄은 올 한해 박정희 관련 학술논쟁의 피날레를 이뤘다. 이 자리는 역사, 철학연구자들이 박정희 시대의 윤리적 집단무의식을 해부하는 자리였다.
한발 떨어져 있을 때 더 잘 보이는지도
▲임지현 교수 © |
한가지 주목할 점은 임지현 교수의 ‘대중독재’ 담론이 한차례 지나간 이후 나온 김형아 교수의 저술이 갖는 성격이다. 이 책이 기존의 박정희 담론과 갖는 차이는 이른바 ‘내재적 접근’이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마치 송두율 교수가 독일에서 북한을 연구한 것과 비슷한, 장하준 교수가 영국에서 한국경제를 논한 상황과 유사한 멘탈리티 위에서 이뤄진 연구였다. 그것은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아주 밀착된, 대상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바탕에 깔고 있는, 연구주체와 대상의 실존적 융합이 돋보이는 연구였다.
역사문제연구소의 ‘국민교육헌장 연구’에서 ‘국민교육헌장과 박정희 시대의 지배담론’을 발표한 황병주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의 글도 이런 측면에서 통찰력을 보여줬다. 황 박사는 왜 국민교육헌장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60년대 초가 아닌, 60년대 후반에 만들어졌는가에 주목한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대중사회의 출현’이라는 사회문화적 원인과 67년 대선결과에 대한 박정희의 불만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정치적으로 소란스런 대학과, 문화적으로 요란한 대중”이 못마땅했다는 점, 그리고 이에 대한 사회 지도층의 우려가 전반적으로 높아, 함석헌 같은 사회지도층조차 “배에 병이 있으면, 하다가 죽을 지라도 외과수술을 해야한다”라고 할만큼 우려가 고조된 시기였다.
다른 하나는 지방에서의 압승과 대비되는 서울에서의 부진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경제개발의 효과가 대선에서 1백만표 이상의 표차로 드러나 만족했으나, 전국득표율 55%에 훨씬 못미치는 서울득표율 47%는 못마땅한 것이었다는 게 황 박사의 설명. “이것봐라” 하는 마음도 들었겠지만,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의석 확보를 앞두고 있던 박정희로서는 국민통합의 계기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추가설명도 나온다.
김형아 교수와 황 박사의 글을 읽으며 느껴지는 것은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박정희 시대를 우리의 역사로 풍부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글은 다른 이들의 글에 비해 박정희가 직접 쓴 글과 연설문에 대한 인용과 분석이 많다. 그리고 박정희 주변인들에 대한 인터뷰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홍성태 상지대 교수, 김석수 경북대 교수는 박정희 시대에 만큼은 전형적인 외재적 접근을 취한다. 학단협 심포지엄에서 ‘한국의 근대화와 발전 패러다임의 변화-박정희 체계에서 생태문화 사회로’를 발표한 홍성태 교수는 박정희 체계를 폭압적 근대화이자, 근대화의 핵심인 정치적 민주화를 포기한 반근대적 근대화로 자리매김한다. 홍 교수의 입장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가장 급진적 비판을 대표하는 입장에 속한다. “박정희가 강력한 군사력을 이용해 세운 새로운 사회체제에 국민은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일갈하는 홍 교수 앞에서 ‘대중독재’니 하는 수정주의적 관점은 설 자리가 없다.
이병천 교수, “‘개발독재론’ 폐기하라”
▲이병천 교수 © |
그렇다면 김석수 교수는 어떤가. 그의 ‘국민교육헌장의 사상적 배경과 철학자들의 역할’이라는 논문에서 박정희는 박종홍·김형효 등 당시 국민윤리헌장의 철학적 합리화에 앞장섰던 학자들의 들러리를 서고 있다.
김 교수는 ‘국민교육헌장’이 “반공·민족 이후에 민주주의”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개인억압의 텍스트라는 점을 표나게 강조하고 있지만, 황병주 박사, 김형아 교수 등은 오히려 국민교육헌장과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지는 갱생의 무드는 억압보다는 ‘긍정’이라는 기제를 내포한다고 보고 있어 대비를 이룬다.
텍스트주의와 과도한 이데올로기 분석
▲윤해동 교수 © |
하지만 아쉬운 것은 윤 교수가 일본과 한국의 차이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교육칙어에는 ‘내가 신이니 나를 따르라’고 하는 종교적 명령이 눈에 확연하다. 그에 비해 국민교육헌장에는 ‘민족’이라는 추상화된 가치를 함께 일궈나가자고 하는 동의와 청원의 뉘앙스가 스며있다.
이것은 큰 차이가 아닐까. 신을 통한 합리화와 민족을 통한 합리화의 차이가 짚어지지 못할 때는, 오늘날 한국의 국민성과 일본의 국민성의 차이 또한 제대로 짚어질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윤 교수는 국민교육헌장을 현실화하는 과정이 “전문을 암송해야하는 등” 식민성이 강했다고 지적하지만, 같은 심포지엄에서 국민교육헌장이 어떻게 학교현장에 보급되었는가의 문제를 살펴본 김한종 교수의 논문에서 간접적으로 반박되고 있다. 김 교수 세대에게 국민교육헌장은 그저 멀리서 낭독되는 목소리였고, 행사 때 게시판에 게시되는 것이었을 뿐 그것을 폭압적으로 내면화한 어떤 심리적 근거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텍스트주의와 경험주의의 방식에서 비롯되는 차이가 아니면 무엇일까.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