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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
  • 최승우
  • 승인 2022.04.12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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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 이정서 옮김 | 새움 | 288쪽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
20세기 최고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
그의 숨소리까지 복원한 유일한 번역

『위대한 개츠비』는 1925년 발표된 이후부터, 백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가장 미국적인 소설’, ‘20세기 미국 문학의 대표작’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작품이다. 실제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읽는 고전 가운데 하나인 이 작품은 로버트 레드포드와 레오나르드 디카프리오 등 당대 최고의 남자 배우들이 개츠비 역으로 캐스팅되어 세 번이나 상업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로인해 소설을 직접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주인공 개츠비의 이름은 너무나 익숙하다. 미국의 고등학교에선 필독서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와 관련된 영화도 많이 나와 있다.
당연히 이런 환호와 찬사는 최근의 일이 아니며, T. S. 엘리엇이나 거트루드 스타인 등 당대 최고의 문호와 평론가들이 이미 이 작품의 발표 직후 피츠제럴드를 ‘문학적 천재’로 규정했을 정도였다.

이 위대한 작품에는 ‘잃어버린 세대’와 ‘재즈의 시대’를 가장 깊이 있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라는 평가도 덧붙여진다. 1920년대 미국은 세계대전 이후 금주법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금욕적 청교도 정신과 재즈로 대표되는 자유분방하고 쾌락적인 예술 정신이 맞부딪치던 혼돈의 시기였다. 『위대한 개츠비』가 지금까지 ‘위대한’ 소설로 남아 있는 것은 이 시기 미국의 혼돈스럽고 일견 퇴폐적인 사회상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방식에 있어 대단히 서정적이며 아름다운 문체에 완벽한 소설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리엇이나 거트루드 스타인이 이 소설의 출간 당시부터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평가한 것은 그래서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위대한 개츠비』는 어떤 작품이었을까?
주인공 개츠비를 불법적 방법으로 돈을 벌어 상류사회에 진입한, 부도덕한 인간으로 이해하고, 데이지라는 옛 연인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다 파멸하는 이야기로 인식하고 있다(당연히 영화와도 그 뉘앙스가 다르다).
그 결과 이 작품의 제목에서 주인공 개츠비를 가리키는 ‘위대한The Great’을 이해하기 힘들자 그것을 역설적인 표현이라고 설명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개츠비는 결코 그런 속물적이고 병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이 바로 실제 이 작품의 쏟아지는 미국인들의 반응인 것이며 개츠비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 번역서에 대한 깊은 오해
왜곡된 번역본에는 ‘위대함’ 대신 ‘의문’만이 남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터무니없는 오해가 생기고 지금까지 바로 잡히지 않고 있었던 걸까?
이 책의 번역자인 이정서 씨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번역자들이 원저자가 사용한 단어와 문장을 오독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번역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정서 번역가가 이 책을 처음 번역해 세상에 내놓은 것은 2018년이다. 당시에도 여러 논란이 있었다. “번역은 반드시 직역을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오해는 역자들이 의역을 한데서 발생한 오류다.”라는 것이 이정서 씨의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학계와 번역계는 “원래 문장을 일대일 대응 시키는 것은 탁상곤론에 불과하다”라고 반발했다.
그에 따라 이정서 씨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앞서 책을 절판시키고 원문과 번역문을 정확히 일치 시키는 번역서를 내놓았?B다. 한쪽에 원문을 한쪽에 번역문을 싣는 파격적인 편집의 『위대한 개츠비』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오늘 새롭게 완성한 3번째 번역서를 출간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역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완벽한 번역이 있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원문 그대로의 서술구조를 지키는 번역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너무 욕심을 냈었다. 문장부호 하나까지 살려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오히려 작품의 재미를 망쳤다는 걸 조금 시간이 지나서 깨달았다.”

그는 그 사실을 안 즉시 앞서의 책을 절판시킨 상태였고, 다시 2년이 지난 지금, 번역에 대한 일체의 언급 없이 원문 그대로의 번역서를 선보이게 된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논쟁으로 유명한 이정서 역자는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또 한 번 국내 번역문학계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셈이다. 우선은 기존 번역에 대한 그의 날선 비판들이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 번역문학계는 뼈아픈 성찰의 기회를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친절한 번역’을 모토로 내건 번역자들의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의역들이 어떻게 작품의 캐릭터와 스토리와 핵심 주제들을 왜곡하는지를 독자들은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은 오묘한 세계다. 단어 하나의 뜻만 달라져도 작품 전체의 의미나 가치가 달라진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 번역이어서 흔히 정답도 없고 원칙도 없다고 한다. 우리말과 서양의 언어는 특히 문자의 구조나 존칭법 등이 달라서 원문 그대로의 직역은 불가능하고 의역만이 가능할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그릇된 인식의 결과 지난 100년의 우리 번역문학은 원전의 가치에서 멀러지고 본래의 의미와 맛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 독자들은 세계적인 고전이라고 이름난 작품들을 읽고 나서도 왜 그 작품이 명저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내용을 곡해하는 경우마저 비일비재했다.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은 이런 오역과 왜곡의 근본원인이 최대한 원문 그대로를 직역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는 인식하에, 구두점 하나까지 살리는 정확하고 바른 번역을 통해 원전의 표면적인 의미를 물론 감추어진 맥락과 저자의 의도까지 그대로 전달하고자 한다. 이상으로만 취급되고 현실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온 직역을 통해 명저의 가치와 내용을 정확히 드러내고, 독자들은 원어민의 독서에 뒤지지 않는 고전 독서의 즐거움을 직업 경험하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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