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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 왜, 라고 질문할 수 없는 난처함
영화비평: 왜, 라고 질문할 수 없는 난처함
  • 이유선 고려대
  • 승인 2005.11.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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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오브 갓’

며칠 전 아주 심한 악몽을 꾸었다. 꿈의 내용은 내가 누군가에게 아주 심한 욕설을 퍼붓는 것이었다. 그렇게 욕을 해대면서 꿈속에서 나는 우울하고 슬펐다. 막상 꿈에서 깨어나 그것이 꿈이었음을 확인하자 미묘한 심경이 되었다. 마치 내 안에 감추어져 있던 어떤 가망 없는 욕망을 본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비로소 상처투성이의 어른이 된 것인가 하는 허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침 주말이라 늘 하던 대로 관악산에 올랐다. 산 위에서 바라 본 서울은 늘 그렇듯 검은 먼지구름에 싸여있었다. 먼지구름에 싸인 도시는 마치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듯이 느껴졌다. 그저 회색빛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그 위를 짙은 먼지구름이 내리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먼지구름 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증오하고, 때로는 기뻐하다가 좌절하기도 하고, 그리고 죽어간다는 생각을 하니 악몽을 꾸었다고 심난해 했다는 사실이 좀 우습게 여겨지기도 했다. 아마도 저 회색의 도시에는 먼지구름을 형성하고 있는 먼지 수만큼의 좌절된 욕망들이 뒤엉켜 있을지 모른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더 현명해진다거나,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살이에서 오는 상처들을 얼마나 잘 보듬어 안고 갈 수 있는가, 희망이 끝내 좌초되더라도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현실의 삶은 감당하기 힘든 모순 그 자체일 테니까.

브라질 영화 ‘신의 도시’(원제 City of God)는 파울로 린스의 자전 소설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가 감독을 맡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갱 영화를 보았지만 이렇게 충격적이고 여운이 가시지 않는 영화는 처음이다. 이 영화가 사실에 바탕을 두고 만들었다는 자막이 올라갈 때쯤이면 영화 속의 잔인한 현실에서 혹시 더 끔찍한 현실 세계로 되돌아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돋는다.

 빌렘 플루서는 '사진은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영화는 너무 잔혹해서 제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기를 빌게 된다. 그러나 아마도 사진 또는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 이유는 현실이 사진이나 영화가 반영하기에는 너무나도 잔혹하며 더 절망적이기 때문에 결코 그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브라질의 수도 리오 데 자네이로 외곽에 있는 빈민촌의 역사를 담았다고 할 수도 있는 이 영화가 실제로 ‘신의 도시’의 아이들을 캐스팅하고 역사적인 고증을 하고, 실제 인터뷰 장면을 그대로 흉내 내면서 재현해내는 것처럼 보이고자 했던 현실의 그 무엇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모순으로 가득 찬 현실이 담고 있는 삶의 아이러니이며 생각과 현실이 끊임없이 어긋나는 삶의 역설이다.

이 영화가 잔혹한 이유는 갱들이 나와서 살인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살인이 너무나도 어이없는 이유로, 아니 아무런 이유가 없이 이뤄지며, 이것이 마치 우리 인생의 희비극이란 그렇게 덧없고 어이없는 것이라는 은유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우리가 생각하고 의도하고 계획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전혀 그대로 작동하지 않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그렇게 어긋나는 현실을 감내하는 것이라는 끔찍한 교훈을 끔찍하지 않게 전달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긋남을 다루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서로 어긋난다. 영화의 장면은 남미의 화려하고 세련된 색채를 담아내며 삼바, 탱고, 그루브 등의 라틴 음악은 빠른 화면의 전개를 신나게 끌고 나간다. 그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러나 포장되지 않은 게토의 질퍽한 길거리와 희망없는 아이들의 깊이 없는 눈빛이다.

무엇보다도 ‘신의 도시’라는 이 영화의 제목은 우리가 얼마나 역설적인 현실을 살고 있는지 대변한다. 제뻬게노일당과 경찰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끼어 있는 ‘로켓’은 ‘신의 도시에서는 도망치면 죽는다. 가만히 있어도 죽는다’는 독백을 한다. 신의 도시에서 구원은 없는 것이다. 모텔에서 총질을 해대는 8살짜리 꼬마 강도의 천진난만한 웃음은 마치 유원지 사격장에서 인형을 상품으로 받기 위해 애쓰는 어린아이를 연상시키지만, 이것은 바로 60~70년대를 풍미한 신의 도시의 보스가 탄생하는 장면이다.

▲스테이크가 쇼티 파 꼬마아이를 쏘는 장면 ©

어긋남의 압권은 제뻬게노일당을 따라나서는 열 살도 안 된 ‘스테이크’가 ‘엄마 친구들이랑 놀다 올게요’하고 나가서는 ‘쇼티’ 파의 7~8세짜리 꼬마를 쏘아죽임으로써 갱단에 입단하는 장면이다. 절대로 결합될 수 없을 것 같은 어린아이들의 놀이와 살인이 이 영화에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서 이후부터는 어떤 장면이 나와도 관객으로서는 놀랄 수가 없다.

이유없는 살인과 폭력은 이제부터는 그것이 우리의 생각이나 의도, 우리의 꿈이나 희망사항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항의해서는 안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이 현실이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제뻬게노 파의 소탕에 나선 ‘넉아웃 네드’ 역시 신의 도시를 구원하지 못한다. 가장 절망적인 것은 제뻬게노를 쓰러뜨린 것이 다름 아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녀야 할 ‘쇼티’들이라는 것이다. 악은 전승되며, 인간은 신의 도시를 구원하지 못한다.

등산을 할 때 가장 안 좋은 대목은 산을 오르고 나면 다시 먼지구름 속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주말산행이 세상의 상처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아마도 나는 다음 주에 다시 산에 오를 것이다. 마치 ‘쇼티’들이 천진난만하게 서로 장난치면서 새로운 적들의 도전에 대비하듯이.

이유선 / 고려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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