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00:20 (일)
떠오르는 여자 안은미, 가라앉는 남자 홍승엽
떠오르는 여자 안은미, 가라앉는 남자 홍승엽
  • 김남수 무용평론가
  • 승인 2005.11.27 00: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Let me tell you something ©
한국 현대무용을 대표하는 두 안무가의 그래프가 얼핏 지지율 추이처럼 엇갈린다. 실은 X축을 ‘작품수’로 하고, Y축을 ‘지원금’으로 했을 때 나올 법한 계량에 불과하다. 다분히 무용계의 은밀한 미시정치를 감안한 표현이기도 하다. 지난해 ‘올해의 예술상’ 수상거부 이후, 되려 궁지에 몰린 홍승엽은 숱한 기금 신청에서 탈락하기 일쑤였다. 신작 발표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기존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지방공연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독일에서 신천지를 개척한 안은미는 춤의 新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국제적인 호평이 낳은 부메랑 효과이기도 하다. 두 사람 공히 세계무대에 통한 독보적인 한국현대무용가다. 또한 교수집단이나 비평권력에서 자유로운 독립적인 프로페셔널 안무가다. 그럼에도, 혹은 그 때문에 정당한 무용담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게 현실이다.

안은미와 홍승엽. 현 시점에서 둘을 나란히 언급하는 것 역시 정당치 못할 수 있다. 안은미가 숨돌릴 틈없이 ‘Let’ 시리즈를 내놓는 사이, 홍승엽은 최근작도 아닌 ‘달 보는 개’, ‘빨간 부처’를 되새김질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대 위에 올려진 작품들은 이미 세상에 던져진 것이며, 관객의 대화적 상상력 속에 수용됐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다소 야박하지만, 이 역시 무대예술의 본질로서 불가피한 것이라 생각한다.  

안은미 : 테크노-샤머니즘, 칼라 미래주의의 춤

안은미는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Let's go’, ‘Let me change your name’, ‘Let me tell you something’(이하 ‘go’, ‘change’, ‘tell’)을 만드는 과정에서 새로운 춤 미학을 구축했다. 이전의 안은미 안무를 두고 미술평론가 이정우는 ‘도망치는 미친년’으로 적절히 아이콘화했다. 한국의 근대가 입힌 폭력의 상흔, 멍, 고통의 즙액을 그녀보다 더 체화시킨 안무는 없었다.

몸은 세상의 반영이다. 그 반영된 몸의 성격을 몸성이라 한다면, 안은미는 뉴요커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1998년, 근대적 몸성의 기억, 습속, 충동을 밝히는 기념비적 공연을 선보였다. '토마토 무덤', '빨간 무덤' 등등 일련의 ‘무덤’시리즈. 토마토 위로 하염없이 넘어지며 무대의 사방 공간을 처절한 슬픔의 물질화로 채웠다. 혹은 벌거벗은 신체가 능욕당하고 난행당하는 충격을 현상했다. 내가 본 안은미는 몸성의 고고학적 탐구가 있는 안무가였다.

그런데 그녀는 ‘Please’ 시리즈까지도 고통의 세상을 인공낙원으로 바꾸고 오색찬란한 키치 미학으로 그 몸성을 치유하려 들었다. 생활세계에 젖줄을 대고 어머니 품속처럼 한껏 노는 것이 안은미의 무대다. 그러다가 어느 모퉁이를 돌면 가해받은 자가 먼저 용서해주는 컬러풀한 풍경이 등장한다. 서늘한 청승인 동시에 타고난 낙천성이 배어나는 풍경이다. 남들이 무당의 흉내를 낼 때, 안은미는 처용과 바리데기의 정신을 무대 위에 동시대화한 것이다.

‘Let’ 시리즈는 시야의 폭이 남다르다. 안은미는 몸성에서 한국이라는 뿌리의 무게를 덜어내고 동서의 회통을 꾀했다. 한국적 머무름 대신 보편적 열림으로서 몸의 확장과 만남이 진행된 것. ‘go’는 서구의 몸과 한국의 몸이 새로운 중심을 잡아가는 세차운동 단계였다.

결국 몸의 축을 새롭게 세우려는 안무가 빛을 발한 것은 ‘change’였다. ‘go’가 서구에서 몸과 휴머니즘의 관계를 내밀하게 탐구한 안무가 사샤 발츠에 대한 동양의 응답 차원이 있었다면, ‘change’는 몸성에 기반해 다시 리듬-서사로 나아간 안은미의 독자적인 진경이다. 세련되고 강력한 리듬-서사는 테크노의 진화와 연관되어 매우 흥미롭다.

즉 장영규의 음악은 테크노에 보이스를 입혀 기계와 인간의 기묘한 스킨십을 가능케 했다. 그 살가움은 거의 즉각적인 환각효과가 있었는데, 일상의 사물이 가진 색채의 무거움 대신에 스펙트럼으로 분리된 빛의 가벼움과 겹치면서 ‘칼라 미래주의’ 같은 낙관을 낳았다.

하지만 기계에 대한 낙관이 허약하거나 통속적이지는 않다.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 같은 전망 대신에 인간적인 쾌락과 덧없는 기계의 느낌을 모두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때때로 강박적이고 로보틱한 테크노가 인간을 압도하기도 하는데, ‘tell’에서 두드러진다.

힘있고 심플한 기계적 리듬 패턴이 지배하지만, 안은미는 다시 자신의 고유한 몸성에 되먹임시키면서 대범하게 치유하려는 샤먼적인 해결을 내놓았다. 테크노에 접근하며 그녀가 보여주는 리듬-서사는 거의 ‘테크노 샤머니즘’이라고 지칭할 만하다.

안은미는 유토피아 체질이다. 하지만 그 유토피아는 진흙탕 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 근대성이든 테크놀로지 문화이든 안은미는 바닥의 생명체에서 하늘을 나는 미지의 흰 새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해야 낙원이 진정한 낙원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거기에 더해 ‘Let’ 시리즈는 ‘단순화’와 ‘증폭’을 통한 리듬-서사가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각성시키고 있어 귀하다. 

홍승엽 : 자아의 신화, 혹은 그림자놀이

홍승엽의 안무는 예나 지금이나 기본 패턴이 있다. 마치 한자나 한글 같은 문자가 정사각형의 정형적 단위에 갇힐 수 있듯이 그는 춤 단위를 먼저 구축한다. 그 단위 속에 빼곡히 채워진 춤의 질량감이 대단한 것이다. 현재까지 그의 대표작이인 ‘달 보는 개’나 ‘데자뷔’ 혹은 ‘빨간 부처’에서부터 최근작 ‘두 개보다 많은 그림자’, ‘싸이프리카’에까지 모두 관통한다.

기본 패턴이 세련되고 우아하기에 홍승엽은 마치 벽돌처럼 쌓아올리거나 펼쳐놓는다. 그의 춤을 건축적이라거나 문학적이라고 말하는 건 언어처럼 철저히 구조화돼있기 때문이다. 2000년 프랑스 리용댄스비엔날레에서 ‘동양의 윌리엄 포사이드’라며 극찬과 함께 매진된 사건도 서구인들이 동양에 대한 신비화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춤이었기 때문이다. 설치미술의 제작과정이 있는 무대미학이라든가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문화적으로 대비하는 아이디어도 참신했지만, 춤의 기본 패턴이 먹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 패턴에 어느 땐가부터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건 홍승엽이 지나치게 깊이에의 추구에 매달리기 때문으로 보인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 그는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특히 ‘두 개보다 많은 그림자’는 ‘그림자’가 존재의 부대 현상으로 무대에 쏟아져 나오면서 급기야 사건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림자에 매혹당한 홍승엽은 한술 더 떠 아프리카의 사바나에 깔린 동물들의 이미지를 그림자로 설치하면서 판타지 감각을 절차탁마했다. 그러나 ‘싸이프리카’는 논란이 엇갈렸는데, 생활세계의 밑그림이 없다는 점, 그림자가 실존에서 이탈해 관념화했다는 점, 반복되는 주제로 인한 불가피한 매너리즘의 징후 같은 것들이 지적됐다. 그럼에도 현대 디지털 문화가 표방하는 시뮬레이션의 감수성, 실체를 새롭게 글쓰기하도록 만드는 사건의 철학, 극도로 세련화된 안무는 과감하게 상찬될 만했다.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가진 방편으로서의 성격을 홍승엽이 차츰 망각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질문에 대해 완강한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은 그의 기본 패턴으로부터 마치 하나의 성냥개비가 들불로 번져나가는 춤의 프랙털 이미지를 박탈하는 게 아닌가 근심스럽게 한다. 모차르트의 작대기처럼 라이트모티프를 활용해 자유자재였던 그의 안무가 패턴이 가진 정형률의 폐쇄공포증에 시달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

최근에 본 ‘달 보는 개’와 ‘빨간 부처’는 그런 염려를 가속화시킨다. 무대의 춤은 무상한 것이다. 이미 몇 년이 훌쩍 지난 그 작품들은 스스로의 틀 속에서 자유로웠던 귀족적 본성을 잊고 퇴락한 틀 속의 안주를 택한 것으로 보였다. ‘달 보는 개’가 가진 그림자놀이, 어둠과 빛의 이분법, 그리고 이미지의 마디와 접속이 보이는 춤은 이미 올드패션으로 여겨졌다. 또한 ‘빨간 부처’가 가졌던 놀라운 미덕은 시간 속에서 많이 감가상각돼있었다. 聖化의 부질없음을 일상이 가진 사사무애의 경지로 풍자하던 ‘똥누기’ 퍼포먼스와 ‘부처 만들기’ 설치 과정은 그동안 익숙해진 눈만큼이나 방편으로서의 힘을 많이도 소진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

그러니 홍승엽에게 신작을 허하기 바란다. 또한 그가 집요하리만치 오랫동안 궁구했던 자아와 정체성의 오래된 고리쩍 질문들도 갱신되기를 바란다. 아니, 기본 패턴이 확장돼 일파만파 번져가는 창조적 역동성이 활발하게 발산되기를. 비슷한 입지에서 놀라운 치명적 도약을 거듭 보여주고 있는 안은미와는 유다른 그의 안무가 기약없이 침강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원에 처한 것은 분명하다. 의욕적인 신작을 기다린다.

김남수 / 무용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GG 2005-11-28 01:49:04
지지율이든 작품수든, 그래프로 나타내려면 X축에 "시간"이 와야 합니다. 물론 Y축에 지지율, 작품수, 지원금액 등이 오는 거죠.

글쓰신분 말씀대로 X축에 작품수, Y축에 지원금액이 온다면, 그리고 안은미씨가 상승곡선을 그린다고 하면, 홍승엽씨는 그에 엇갈려야 하므로 하강곡선, 다시 말해 지원금액과 작품수가 반비례한다는 기괴한 결론이 나오는 거죠.

글쓰신 분의 의도를 제대로 표현하려면 말씀하신 "그래프"는 "시간" 축을 더해서 3차원으로 그려야 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