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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_교수들에 대하여
에세이_교수들에 대하여
  • 한원균 청주과학대
  • 승인 2005.11.26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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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고립주의 혹은 직무유기

며칠 전 서울대 총장은 교수들이 개인적인 연구에만 관심을 갖고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소홀하다고 비판하면서 심지어는 언론에서 그들을 다루어주길 바란다고 말한 바 있다. 일주일에 하루만 출근하는 교수가 많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놓았다. 상당히 공감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국립대학에 몸담고 있는 관계로 교수들의 이와 같은 자율성(?)이 지니는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하고 있던 차였다. 대학의 총장이 나서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가라고 반문할 사람도 상당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위기는 언제나 그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러시아계 귀화 한국인으로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한국학과 박노자 교수도 한국대학은 “세계 100위 진입과 같은 무의미한 궤변을 접어두고 시간강사 처우개선 등, 대학이 진정으로 발전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리용대학의 레지 드브레 교수는 ‘지식인의 종말’이라는 저서에서 최근 프랑스 지식인들은,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고 신중함보다 민첩함을 중시하며 본질보다 관계를 우선시하면서 자신을 홍보할 기회만 엿보는 존재라고 비판한 바 있다.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임상적 징후’를 그는 집단자폐증과 현실감 상실, 비전의 부족, 그리고 즉흥성과 도덕적 나르시시즘이라고 요약한다.


그렇다면 한국 대학의 교수사회는 어떤가. 우리의 교수사회는 진정으로 건강한 지식인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가. 교수 사회에서 생산된 담론은 얼마만큼의 유용성과 가치를 지니는가. 혹은 담론의 생산방식은 얼마만큼 투명하고 공정하며 합리적인가. 이런 질문 앞에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최근 각 대학들은 교육부가 제시하는 각종 지표상의 수치를 맞추기 위해 비정년트랙 교수를 대거 모집하고 있다. 표면상으로는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경쟁력의 제고라는 논리가 교수인력 시장에도 적용되는 듯이 보이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신분상의 불안감 증대, 종속적인 계약관계를 통한 자유로운 의견 개진의 원천봉쇄, 모교 출신의 우선 채용, 이로 인한 예속적 관계의 심화와 재생산 등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엄격한 시스템을 적용해 공정하고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교수를 선발한다고 믿는 사회적 신뢰가 심각하게 균열되고 있다는 지적은,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교수 사회의 도덕적 정당성을 근본에서부터 의심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은 비정년트랙 교수임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수 인력 수급에서 지식과 전문성 보다는 도제적 유착이나 역학관계를 중시하는 관행적 태도가 건강한 지식인으로서의 교수를 만들어내는데 일차적인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 교수사회에 자리를 잡은 신진인력들이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숙제가 있다면, 교수 사회 내의 크고 작은 모임이나 집단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폐쇄적 집단주의의 논리는 유형, 무형으로 교수를 압박해 온다. 국립대학일수록 이와 같은 생리에 모종의 음모나 부도덕한 전략이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총·학장 직선제가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1997년에 시작된 교수 생활 9년 동안의 세 번에 걸친 선거가 내게는 교수들의 성향과 태도를 너무나 잘 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똑같은 ‘운동이나 친목모임을 만들자’는 이야기도 선거철인가 아닌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는 점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담론의 교환이 발화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작용을 한다는 소박한 이론을 실천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정황과 이해관계에 따라서 동료교수를 ‘관리대상’으로 생각해 모종의 권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는 자기이해의 천박함을 드러내는 가장 나쁜 의미의 정치적 망상에 속한다. 교수사회는 상대적으로 높은 책임의식과 합리적 판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율성이란 연구와 강의라는 기본적인 과제를 수행하는 책임주체에게 부여되는 순수한 가치이다. 동료교수를 정치적인 이해관계의 도구로 삼으려는 시도들이 더욱 추악하게 보이는 이유는 여기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자율적 주체의 신념이 왜곡된 형태로 치닫는 경우도 자주 목도된다. 동료들 사이의 인간적 신뢰의 중요성을 망각한 채 자기도취적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우아한 고립주의’가 교수사회의 경직성을 유지하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얼마 전 지방의 모 대학의 교수들이 연구비를 개인 용도로 유용한 사건이 있었다. 상당히 규모가 컸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지만, 문제는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이 같은 사례가 교수사회에서 너무나 빈번히 일어난다는 점에 있다. 정부의 재정지원 사업이나 외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경우 경비지출 기준의 경직성이 교수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융통성(?)을 발휘하게 한다고 하지만, 행정 절차의 신축적인 태도와 함께 교수들의 책임 있는 자세가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더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과제를 수행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특정 교수에게 편중되는 과중한 업무량이다. 상대적으로 원로 교수들은 그 혜택만을 챙기는 현상이 대학 사회 곳곳에서 만연하고 있다. 이것은 과제에 참여해 실질적인 결과물을 제출하는 사람의 기회가 박탈되는 역차별적 현상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분과별 학문에서는 소위 ‘선택과 집중’이라는 원리가 지켜지는 듯하지만, 그 하위부류에서는 여전히 ‘나눠 먹기식’ 공정 분배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논쟁과 토론의 부재는 교수사회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이다. 시민사회의 기본원리 가운데 하나는 욕망하는 주체들의 상호승인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승인과 긍정을 통해 자신 역시 주체로 인정받는 관계설정, 비판과 자기비판을 통한 논쟁적 토론이 활성화되는 공간의 확보가 교수 사회의 건강성을 지키는 밑그림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교수 임용과정에서 성립된 권력관계, 혹은 특정한 이해를 둘러싼 편가르기가 해소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같은 구도는 공허한 망상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교수사회가 건강한 지식사회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합리적이고 실천적인 의식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분위기의 형성이 중요하다. 합리적 의식이란 교수의 직분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매우 기초적인 덕목에 속한다. 연구와 강의의 중요성은 시대가 변해도 지켜져야 할 가장 기본적 패러다임이다. 이는 ‘새삼스럽게’ 확인되어야 한다.

최근에 강조되고 있는 산학협력 사업과 이익창출을 위한 프로젝트는 그 현실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대학사회, 특히 교수사회를 왜곡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유용성이라는 기준이 학문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려서, 인문적 지성과 교양적 지식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소수집단의 자위적 수단에 불과한 ‘그들만의 외침’으로 치부되는 현실상황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합리성이란 인문학을 전공한 교수에게만 해당되고 찾아져야 할 가치가 절대로 아니다. 자기 학문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고 소중한 일인가. 하지만 그 가치를 재는 기준은 물질적 부의 창출여부가 아니다. 무차별적 경쟁원리를 대학운영에 도입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의 발상은 우리 학문의 천박함을 가속화시킬 뿐이다. 이런 과정에서 합리적 판단과 토론을 통한 성찰적 담론의 생산은 교수 사회에서 ‘있으면 좋은’ 부차적인 장식물이 되어버렸다.


상대적으로 높은 도덕적 수준과 훼손되지 않은 권위의 상징인 교수 사회가, 학문적 열정과 현실의 역학구도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데는 물론, 우리사회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상당히 많다. 최근 국립대학 통합 등 구조개혁의 몇몇 모델은 역설적으로 고통의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하지만 상황이 어떠하든, 교수는 일차적으로 충실히 가르치고 글 쓰는 일에서 자기존재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교수사회를 바라보는 따가운 눈총은 기본적인 직무의 유기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행위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통해서 그 유의미성이 인정되듯이, 교수 사회는 비판과 성찰의 맥락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데서 그 추락된 권위의 회복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한원균 / 청주과학대·국문학

필자는 경희대에서 ‘고은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일굼의 문학’, ‘고은 시의 미학’, ‘비평의 거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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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교원 2005-11-28 23:54:31
정운찬은 현실을 대체 알고 한 소리인지. 요사이 중견에서 젊은 교수중에 일주일에 학교 한 두번 나가고 밖으로만 도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내참 4 5과목씩 가르치고, 업적물 달성하기 위해 통줄이 타게 연구하고 학술지에 글내야하는걸 정녕 모르고 한건지... 대설대 총장 된 이후 계속 설대 싸고돌면서 큰소리내는데 솔직이 재수없군. 한때 이 사람이 진보라고 한 적이 있었지. 낭중에 정치나 안하면 다행일꺼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