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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5-1) 경천사 10층석탑의 비밀
특집: (5-1) 경천사 10층석탑의 비밀
  • 이은혜 기자
  • 승인 2005.11.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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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부터 양식까지 원나라 영향…층수 논란도 일어

새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하면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 중 하나는 ‘경천사 십층석탑’이다. 박물관 1층 VIP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3.5m에 달하는 거대한 석조물이 실내에 안치되다 보니 관람객들이 압도되지 않을 수 없다.

매 층마다 새겨진 화려한 도상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며,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2층, 3층으로 이동할 경우 관람객들은 점점 더 상륜부 쪽에 가까워져 꼭대기 층까지 탑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일제에 밀반출됐다가 훼손돼 돌아왔고 서울의 각종 오염물질속에서 수난을 겪었기에 그 상징성이 내뿜는 힘은 더 크다.

하지만 박물관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이 탑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직 궁금해해야할 많은 비밀들이 있다. 경천사석탑 1층 탑 몸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대화엄 경천사에서 원나라 황제와 태자 천하의 만만세, 황후 폐하의 천추만세 등을 축원합니다…至正八年 戊子三月日.” 즉, 원나라 황제를 위해 세워진 이 탑은 그 기법에 있어서도 역시 원나라의 것을 따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세상에 전하는 말이 ‘원나라 탈탈승상이 願刹로 만들고 진녕군 강융이 원나라에서 기술자를 뽑아다가 이 탑을 만들었다’ 하는데 지금까지 탈탈승상과 강융의 화상이 있다”라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즉 원나라 승상의 사위였던 강융이 장인 탈탈의 소원을 기원하기 위해 순전히 외래 탑의 형식을 그대로 우리 땅에 건립했던 것이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의 설명카드에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발간도록에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특이한”이라는 단 한 줄이 나와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어떤 점에서 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인지 자연히 궁금해진다. 신용철 통도성보박물관 연구원(석조미술사)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부분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짚는다. 첫째, 기단부의 亞자형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원나라의 영향이다.

둘째, 재질이 우리나라에 흔했던 화강암 석탑이 아니라 대리석인 점은 고려시대 말기까지 유례가 없던 일로 원나라의 영향이다. 대리석은 우아한 느낌을 주나 강도는 화강암보다 훨씬 약한 단점이 있다.

셋째, 탑 최하단부에 지면과 닿는 부분에 꼬부랑 문양(270도쯤 휘어진 구름모양)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전혀 없던 전통문향으로 원 라마탑의 영향이다. 넷째, 원나라탑을 라마탑 또는 오륜탑이라고 하는데, 오륜탑이란 사각형→원→삼각→반달→고주(뾰족한 원형)로 이는 여러 상징의 의미를 담고 있다. 경천사 십층석탑 역시 다섯 개의 상징물이 탑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오륜탑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 사실 때문에 故 장충식 동국대 교수(미술사)는 1백20년 후 건립된 원각사 석탑이 경천사석탑을 그대로 모방한 것을 두고 “주체적 미술사관을 이룩하지 못했다”라고 비판할 만큼 경천사탑은 사실 우리에게는 ‘생소한 것’이다.

그렇다면 원나라의 양식의 대표하는 이 석조물을 과연 한국의 대표박물관, 대표자리에 둘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한국사)는 최근 한 기고 글에서 “원의 영향으로만 단정하면 고려문화의 총역량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경천사 석탑을 있게 한 것은 탑에 새겨진 다양한 도상에 무게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두 번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판각한 고려시대 문화의 역량 없이는 탑에 정연한 체계를 지닌 도상의 표현은 불가능하다”라고 강조해 경천사탑을 이뤄낸 고려인의 손길에 더 무게를 둔다. 즉, 양식은 원나라 장인의 기술로 원의 양식은 따랐지만 실제 많은 부분 동원된 건 고려의 기술자라는 이야기다.

사실 이 부분은 어디에도 명확하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학자들 대부분이 추측상태에 머무르고 있는데, 고영섭 동국대 교수(불교사)는 “고려 민중들의 손을 많이 거쳤을 것이라고 짐작하는데, 기술자가 원나라 사람이라 하여 장인들도 원나라 사람이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 즉 원의 역할이 몇 할이고 고려인의 솜씨가 몇 할인지를 밝혀낼만한 자료가 현재로선 없는 상태다.

또 이번 복원에서는 탑의 최상륜부는 복원되지 못했는데, 이 역시 원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는 복발형 상륜을 추가했었으나, 현재로서 참조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 자료인 1902년 사진자료에는 이와 다른 모습을 갖고 있기에 이번 복원에서 제외시켰다고 한다.

일제에 반출됐다가 돌아온 수난의 문화유산으로서 해체 당시의 상황이 전혀 밝혀지고 있지 않아 사리장치법, 장엄구의 내용 역시 아직 알 수 없다.

▲1960년 복원작업을 할 때의 상륜부 모습. 기와모양의 지붕 위에 있던 것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판단해 복원하지 않았다. ©

이 탑은 몇몇 논쟁거리도 안고 있다. 그중 하나가 층수 문제다. 장충식 교수의 저서 ‘한국의 탑’(일지사 刊, 1989)을 보면, 저자는 “삼국 이래 조탑소의경전이라 할 수 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의해 홀수의 탑만을 만들어왔던” 한국의 상황이나 “기단 상부의 12불회가 새겨진 전각부분을 층수로 보기에는 수긍이 가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10층’이란 명칭은 보류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즉 전각부분 3층을 제외하고 ‘경천사 7층석탑’이라 하거나 혹은 ‘다층석탑’이라 부르자는 것. 이에 대해 아직 학계에서는 논의가 제대로 이뤄진 바가 없다. 다만 의견이 갈리고 있을 따름인데, 김경표 충북대 교수(건축사)는 “일본탑에도 10층탑은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탑의 층수가 10층이 확실하므로 명칭상의 문제는 없다”라는 쪽이다.

반면 천득염 전남대 교수(건축사)는 “우리나라에 짝수층 탑이 없었기 때문에, 추정에 근거해 ‘경천사 11층석탑’으로 논문에 몇 번 표기한 바가 있다”라고 한다. 즉 천 교수는 한 층 정도는 유실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 것으로, 이는 장 교수의 입장과는 또 다르다.

사실 ‘십층’이란 명칭은 1960년 경복궁에 복원되면서 공식명칭으로 확정됐고, ‘조선고적도보’라는 책에 실려 있는 1910년대의 사진을 봐도 ‘10층’이라는 기록되어 있지만, 그러나 조성 당시의 기록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명칭을 추정할 순 없는 상태다. 따라서 이 역시 학계가 해결해야 할 경천사탑의 하나의 비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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