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6:10 (토)
비평정신: (4) 실학자 네 사람의 딴 생각
비평정신: (4) 실학자 네 사람의 딴 생각
  • 강명관 부산대
  • 승인 2005.11.2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초정 박제가의 반민족주의 앞에서

우리나라는 땅이 중국과 가깝고 音聲도 대략 중국과 같다. 그러니 온 나라 사람이 본래 말(한국어)을 깡그리 버린다 해도 안 될 것이 없다. 그렇게 한 뒤라야 오랑캐라는 한 글자[夷]로 불리는 (수치를) 면할 수 있고, 수천 리 우리나라 땅이 절로 周·漢·唐·宋의 風氣를 갖게 될 것이니,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국말을 버리고 중국말을 쓰자는 주장이다. 문득 이광수가 떠오른다. 香山光郞으로 이름을 바꾸고 골수까지 속속들이 일본인이 되자고 했던 그 사람 말이다. 한데 위 발언은 식민치하라는 억압적 상황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모국어를 버리고 중국어를 쓰는 것이 문명화의 길이라고 ‘자발적으로’ 주장한다. 딴 사람이 아닌 실학자 박제가(1750~1805)가 ‘北學議’에서 편 도도한 변설이다. 모국어를 버리자고 거침없이 말하는 박제가는 민족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박제가의 친구 이덕무(1741~1793)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대저 우리는 조선 사람이니, 말과 의복, 풍속 法制를 한결같이 우리나라를 따라야 할 것이다. 만약 초탈하여 時俗을 어기고자 한다면, 망령된 사람이 아니면 미치광이다. 다만 생각과 도량만은 중국을 버릴 수 없다. 그렇다 해서 어찌 꼭 직접 중국에 가서 배워야만 하겠는가. 지금 經籍은 중국 사람이 만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잘 읽는다면 나의 생각과 도량이 쩨쩨해지지 않고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을 것이다.”(‘耳目口心書一’)
이덕무와 박제가는 막역한 친구였다. 하지만 자국어에 대한 생각은 판연히 다르다. 이덕무는 조선의 말과 의복, 풍속, 법을 버리는 사람은 정신이 나간 미치광이라고 말한다. 이덕무에 논리를 따르면 박제가는 미치광이다. 그렇다면 이덕무는 주체적, 민족적인가. 그 역시 중국의 經籍을 포기할 수는 없다. 경적은 경전을 위시한 중국의 서적이다. 이덕무의 높은 수준의 생각과 도량 역시 중국 서적에 종속되어 있다. 박제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절반의 민족의식만 있는 셈이다.

유득공(1749~1807)은 37살 젊은 나이에 ‘渤海考’를 쓴다. ‘발해고서’에서 그는 고려가 발해사를 쓰지 않았기에 발해의 고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그 결과 광대한 땅이 남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발해고’는 20세기 한국사 서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책의 발해―북국, 통일신라―남국의 구도는 한국사에서 ‘남북국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발해사가 한국사가 됨으로써 윤도현은 ‘광야에서’ “광활한 만주벌판”을 노래하고, 서태지는 ‘발해를 꿈꾸며’로 젊은이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는다. 유득공은 에누리 없는 민족주의자다.

박제가·이덕무·유득공은 이른바 실학자―북학파다. 실학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은 민족의식이다. 실학 연구는 조선의 역사, 문화가 갖는 개별성과 고유성에 대한 자각이 민족의 언어와 역사, 지리 등의 연구로 구체화되었다고 말한다. 민족의식에 입각한 저술활동은 실학의 중요한 성과로 꼽히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민족이란 혈통과 문화―언어의 동질성에 의해 정의되는 집단이다(물론 이 혈통과 언어, 이 두 가지 장치는 허구적 장치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자국어의 수호에 열중한다. ‘국어’의 순수성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운동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도 다 있다. 민족의식에 충만해야 할 실학자 박제가는 도리어 모국어를 버리고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지 않는가.

박제가·이덕무·유득공의 모든 생각이 같을 수는 없다. 그들의 학문적 문학적 취향과 관심은 같은 부분도,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그들을 실학자로 묶고, ‘민족의식’이란 동질성만을 읽어내려 한다. 한데 보다시피 그들의 민족에 관한 생각은 극과 극을 달린다. 나는 이른바 실학자들의 생각과 학문, 문학 속에 ‘민족’이란 요소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을 일괄하여 민족, 그리고 나아가 근대란 코드로 읽어내려는 것은 강박증이 아닌가 한다.

박제가·이덕무·유득공과 한 동아리였던 북학파의 좌장 燕巖 박지원(1737~1805)을 읽어보자. “마을의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읽기에 싫증을 내는 것을 꾸짖으니, 하는 말인즉 ‘저 하늘을 보면 푸르기 짝이 없는데, 天 자는 푸르지가 않잖아요. 그래서 읽기가 싫어요.’ 이 아이의 총명이 창힐을 굶겨 죽입니다.”

유한준(1732~1811)에게 보낸 편지다(‘答蒼厓之三’). ‘天’ 자에는 하늘의 무한히 다양한 푸른색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호 ‘天’은 세계의 구체성과 다양성을 폭력적으로 배제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다. 세계는 훨씬 무한히 복잡하고 다양하다. 박지원은 ‘菱陽詩集序’에서 까마귀의 색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 황금빛, 연록색, 자줏빛으로 보인다고 한다. 곧 까마귀의 색을 ‘黑’ 자만으로 고정하려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연암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가. 세계에 대한 一理的 해석의 폭력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한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실학자 박제가의 언어관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것인가. 민족이란 코드로 박제가를 읽고 실학을 이해하려 한다면, 실로 당혹스런 사태에 직면한다. 문제가 어디서 꼬이기 시작했는가. 한국한문학은 국문학의 영역에 속하고, 그것은 이른바 한국학의 영역에 포괄된다. 한국학을 구성하는 뼈대는 민족이다. 나는 이 ‘민족’이 심히 의심스럽다. 만약 민족이란 코드로 한국사를 구성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민족은 위대했다, 고난을 겪었다, 다시 위대해졌다”라는 단일한 신화적 서사를 구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연암이 말했던 다양성을 배제하는 일리적 해석이리라.

끝으로 다시 연암을 읽는다. “雩祀壇 아래 桃渚洞 골목 안 푸른 기와 사당이 있다. 거기에는 얼굴이 붉은 빛으로 번질거리고 수염이 거룩한, 점잖은 關雲長의 塑像이 있다. 남자나 여자나 학질을 앓으면, 환자를 소상이 앉아 있는 床 아래에 떼밀어 놓는다. 환자는 너무 무서워 넋이 나가고 혼이 빠져 그 김에 寒氣가 아주 싹 달아나고 만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도무지 겁을 내지 않고 그 위엄스러운 관운장 소상을 마구 가지고 논다. 눈알을 후벼도 눈을 끔뻑이지 않고 콧구멍을 쑤셔도 재채기를 하지 않는다. 다만 한 덩어리 흙 인형일 뿐이다.”(‘?處稿序)

연암의 문학비평을 논할 때마다 인용되는 글이다. 관운장의 소상이란 우상에 불과하다. 한데 눈에 보이는 것만이 우상이 아니다. 학문에도 우상이 있다. 연암의 문학을 논하고 그의 실학사상에 찬탄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만든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연암은 연구 대상으로만 존재할 뿐, 그의 사상은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슬프다!

강명관 / 부산대·한문비평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조선후기 여항문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 등의 저서와 ‘한국 문학사 연구에서의 성리학, 실학 그리고 근대’ 등의 논문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