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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조언_‘정치학’과 ‘시학’,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전문가 조언_‘정치학’과 ‘시학’, 어떻게 읽을 것인가
  • 한석환 숭실대
  • 승인 2005.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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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공동체는 이웃 개념…詩學은 보편성 논하는 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을 다양하게 부른다. 그냥 ‘정치학’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정치철학’, ‘인간적인 것의 철학’이라고도 한다. 또 그건 ‘실천철학’이기도 하다. 정치학이 ‘실천적’이라 불리는 건 그 학문의 목표가 실천에 있기 때문이다. 실천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활동이다.

어떤 것이 ‘인간적’이라는 함은 그것이 인간에게 적격이란 의미다. 동물은 몸을 움직이긴 하지만 ‘실천’하진 않는다. 또 신은 사고만 할 뿐, 무엇을 움직이거나 무엇에 움직여지는 존재가 아니다. 신이 세계를 움직인다고 하지만 그건 비유일 뿐이다. 실천은 오직 인간만이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을 인간적인 것의 철학이라고 부른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다.

‘정치적’(폴리티콘)이란 폴리스와 관련돼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본래 폴리스에서 살게끔 생긴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라고 규정한 이유도 그런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으로 보면, 인간이라 해서 모두가 같은 정도 인간인 건 아니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며, 주인의 소유물로서 살아 숨 쉬는 연장일 뿐이다. 그건 그가 인간의 본질, 즉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를 구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여자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본질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자는 자유민 남자뿐이다. 그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다. 지배와 피지배 관계의 정당성은 여기서 발원한다. 주인과 남자는 각각 노예와 여자보다 우월하다. 따라서 그들을 지배할 자격이 있다. 주인과 노예, 남편과 부인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관계다. 그러므로 그들 사이에선 바르다느니 바르지 못하다느니 하는 말이 나올 수가 없다. 이 말들은 자유와 평등을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나올 수 있다. 자유민 남자들 사이에서 지배-피지배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그들은 번갈아 지배자의 위치에 오른다.

폴리스는 자유와 평등이 깃든 공동체다. 정의는 폴리스라는 공동체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도록 하는 질서의 역할을 한다. 정의는 이처럼 폴리스 차원에서만 문제될 수 있는 성질의 덕목이자 규범이며, 다른 공동체들에선 법이나 정의가 문제로 부각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공동체들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실천적이다’, ‘인간적이다’, ‘정치적이다’, ‘정의롭다’, ‘이성적(또는 합리적)이다’는 나란히 움직이는 개념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개인도덕과 국가공동체의 밀접한 관계는 근대적 국가 이해의 매력적인 대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와 유리된 상태에서는 개인을 규정할 수 없다는 입장의 대표적인 예다. 공동체에는 개인을 위한 좋음(善)이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그의 저작들 가운데 가장 많이 수용됐다. 철학자가 詩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뭔가. 그가 보기에 시는 보편적인 차원에서 현실을 재현한다. 시는 특정 개인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러이러한 성질의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묘사한다. 그런 점에서 시는 개별적인 것을 다루는 역사보다 보편성을 논하는 철학에 가깝다.

시는 비극과 희극, 서사시, 디튀람보스 등을 포섭하는 보편적인 개념이다. 이런 시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뭔가. 시는 본질적으로 현실의 모방(미메시스)이다. 이건 시가 뭔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모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거나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래야 마땅한 것도 모방될 수 있다. 시의 모방은 특정의 사실적 사건의 모방이 아니다. 시는 대체로 보편적인 또는 이상적 상태를 모방한다.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일어날 걸로 예측되는 일, 즉 개연성의 법칙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희극론은 전해지는 게 없고 서사시에 관한 논급은 아주 소략하지만, 비극론은 ‘시학’의 큰 덩어리를 차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은 ①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갖는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② 쾌적한 장식을 갖는 언어를 사용하고 ③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④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⑤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淨化)를 행한다.

이런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 고유한 쾌감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러나 카타르시스에 관해선 아리스토텔레스가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로 그 말을 쓰는지 알 수가 없다. 그나마 도움이 된다면 교육문제와 관련해 음악의 카타르시스 효과를 말하는 ‘정치학’ 제8권(제6장~제7장)의 논설 정도가 될 것이다.

‘시학’ 제20장~제2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렉시스’라는 표제 아래 조사와 문체를 다룬다. 저변에 깔려 있는 생각은 동일한 사안이라도 다르게 표현될 수 있으며 단어의 선택은 말의 내용이 청자에게 달리 비쳐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시학’을 수사학적 관점에서 읽도록 부추기는 대목이다.

한석환 / 숭실대·서양고대철학

필자는 숭실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 전개된 존재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존재와 언어'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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