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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노동기사단과 공화적 자유: 지금, 우리는 자유로운가?
19세기 노동기사단과 공화적 자유: 지금, 우리는 자유로운가?
  • 최승우
  • 승인 2022.02.22 14: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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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고레비치 지음 | 신은종 옮김 | 지식노마드 | 472쪽

이 책은 19세기 미국 노동기사단(the Knights of Labor)의 공화주의 사상과 실천을 치밀하게 고찰하고 있다. 이를 통해 미국 노동운동이 현대 공화주의 사유의 발전에 어떻게 공헌했는가를 밝힘은 물론,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를 야기할 정도로 타락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대안적 담론과 윤리를 제시한다. 저자는 이를 ‘노동공화주의’라 명명하고 현대 공화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하나의 이론으로 체계화한다. 그 핵심내용과 시사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공화주의는 신공화주의(neo-republicanism)으로 불리는 현대 공화주의 사상의 흠결을 보완한다. 90년대 이후 신공화주의가 정치 영역에서 자유의 제도화에 대해 천착했다면, 이 책의 저자인 고레비치는 ‘사회경제적 영역에서의 자립’을 자유의 본질적인 요소로 파악하고, 이를 구현하려고 했던 이론적, 실천적 노력을 19세기 노동기사단의 역사를 통해 조명하고 있다. 공화적 자유의 보편화와 이를 통한 사회경제적 자립, 임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기획한 19세기 노동기사단의 지향을 ‘노동공화주의(labor republicanism)’로 명명한다.

둘째, 노동공화주의는 임노동체제를 대체할 대안적 생산체제로서 ‘협력적/공화적 생산체제’를 제시한다. 노동기사단은 임노동 체제 아래에서는 공화적 자유가 보장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협력의 가치에 기초한 공화적 생산체제를 대안을 구상했다. 또한, 이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5천여 개가 넘는 협동조합을 조직해 운영했다. 이 실험은 비록 (역사적으로는) 실패했으나, 19세기 산업사회 초기라는 당대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협동조합의 이상을 제시하고 실천한 노동기사단의 활동은 말 그대로 ‘선진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셋째, 협력적/공화적 생산체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윤리가 중요한데, 저자는 고전 사상가(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나 근대 인문주의 사상가(마키아벨리, 해밀톤 등)에 의해 정초된 시민적 덕성(civic virtue) 개념을 현대 사회에 부합하는 새로운 감각, 즉 노동공화주의적 윤리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 윤리의 핵심은 연대다.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자개연)’이라는 이론적 성취를 비판적으로 계승해 협력적/공화적 생산체제를 구축하되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윤리를 내장한 주체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그 윤리란 공화주의적 삶의 양식인 덕성(아리스토텔레스의 아레테(?ρετ?, 영어: arete) 구별되는)을 새롭게 발전시킨 연대다.

그렇기에 옮긴이는 노동공화주의를 ‘정치경제학’이 아닌 ‘윤리학’으로 읽어야 함을 제안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찍이 칸트를 경유해 마르크스를 읽어낸 방식 - 《자본》에 내재한 윤리적 계기를 찾고 이를 바탕으로 이를 실천하는 윤리적 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 은 노동공화주의 독법으로 안성맞춤이다. 노동기사단의 사유와 실천을 사회운동사나 지성사의 관점이 아닌 윤리학으로 읽어낼 때, 협력적/공화적 생산체제라는 이상은 현실적 전망이 된다. 이를 구현할 주체의 상이 명확해지며 동시에 그 주체들이 갖추어야 할 덕성과 윤리 감각이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노동기사단의 역사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넷째, 노동공화주의는 공화주의의 핵심인 지배/종속에 대한 개념을 세밀하게 벼림으로써 지배/종속의 공간이자 위험의 공간인 현대 작업장의 부자유 문제를 새롭게 드러낸다. 특히나 21세기에 들어서는 작업장에서의 노동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이제 고전적 양식을 지나 은밀한 방식으로 진화(?)하면서 노동자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잠식하고 있다. 지나친 성과주의로 인해 자기착취가 일상화되고 있는 반면 착취자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알랭 쉬피오가 지적한 숫자에 의한 통치(數治)는 성과주의적 지배의 가장 발전된 형식이다. 이는 고도로 발달한 정보통신기술과 자본의 자의적 지배의 기술적 결합으로 노동자의 (비지배) 자유를 침식하고 자본의 지배를 완성한다. 태움 등 직장 괴롭힘 문제의 배후에는 자본이 자기통제를 내면화한 노동자(복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내는 데서 나아가 노동자 스스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감시를 대행하는 주체’를 생산한 결과다. 이러한 사회문제는 노동공화적 자유의 관점에서 보다 깊게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다섯째, 노동공화주의는 껍데기만 남은 현대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건져내는 담론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허술하다 못해 반(反)민주적이기까지 한 선거제도를 목도하며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하거니와 자유의 개념을 새로이 정초하는 담론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유는 민주주의의 중핵적 가치로 민주주의의 기원이자 발전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자유의 왜곡, 곧 불간섭 자유의 이기와 타자에 대한 배제의 확산이 민주주의의 타락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이를 자유의 패러독스라 불러도 좋겠다. 노동공화주의는 이 역설의 배후를 사회경제적 자유의 부재에서 찾는다. 제도정치의 영역이 아닌 사회경제적 영역, 즉 노동과 생활의 세계에서의 부자유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고레비치의 저작이 현재 미국과 유럽의 정치학계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작’이 된 것은 기존의 공화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사회경제적 자유’를 공화적 자유의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이론적 외연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8월, 정치학계의 최고 권위 저널인 〈Political Theory〉는 이런 가치를 인정해서 이 책에 대한 정치학자들의 논쟁을 담은 지상 심포지엄을 실었다.

여섯째, 매우 주목해야 할 사항 중 하나는 노동공화주의가 19세기 페미니즘을 노동의 관점에서 정초한 담론 중 하나라는 점이다. 노동기사단은 당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노동’을 운동의 중심주제로 삼았다. 여성의 참정권 보장은 물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최초로 주장한 조직이다. 대부분이 여성인 가사노동자를 조직한 첫 노동조합이 노동기사단이다.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여성 노동자야말로 남편보다 더 힘겹고 긴 노동시간을 견뎌야 하는 ‘시민 계층’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 공표했다. 또한, 여성 노동자의 역량 강화가 필요하다고 보고 이들을 위한 독서와 쓰기 교육 등 시민교육을 제공했다. 노동기사단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자치능력을 갖춘 자율적 주체’로 본 최초의 노동조직이며 노동의 관점에서 근대적 페미니즘을 발전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일곱째, 이 책의 또 다른 가치는 방법론과 그 효과다. 푸코의 고고학, 계보학적 방법론에 필적할 만큼, 저자는 방대한 사료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날카로운 비평을 통해 노동공화주의라는 새로운 에피스테메를 개척하고 있다. 고레비치가 인용하고 분석한 사료는 새로 발굴된 자료로 노동의 지성사를 개척하게 하는 귀중한 자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 고고학적 발견이 주는 효과와 영향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그 눈부신 기록 속에는 공화적 자유를 꿈꾸고 이를 노동과 생활의 세계에서 구현하기 위해 협력하고 학습하며 연대하는 80만 노동기사단원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들은 공화적 자유라는 깃발을 가슴에 품고 역사의 한 국면을 형성했으나 결국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 실패는 패배가 아니라 찬란한 몰락이다. 살아 숨 쉬는 영감을 고스란히 역사 속에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들의 성취에 무엇을 더 보탰는가? 아니 그들을 알기는 하나? 노동기사단의 열정과 몰락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저자와 역자는 노동과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공화적 자유를 구현하고자 했던 노동기사단에 경의를 표한다. 이들이 꿈꾸고 실현하고자 했던 세계는 불가능에 가까운 이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은 외려 실천적 의미를 더한다. 바꾸어야 할 현실이 무엇을 지향해야 할지 그 궁극의 지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는 왜 그들만큼 멋지게 실패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이 질문은 새로운 노동세계를 고민하다가 결국 좌절하고 만 모든 이들이 다시 품어야 할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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