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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쟁점: 牛溪學派는 성립 가능한가
학술쟁점: 牛溪學派는 성립 가능한가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11.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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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동 교수 학맥·학풍 정리...학계 贊反 양론 팽팽

조선 중기 이이와 함께 기호학파 서인계열을 이끈 牛溪 成渾과 그 학통을 ‘우계학파’로 새롭게 조명한 저서가 출간됐다. 황의동 충남대 교수(한국유가철학)는 지난 몇 년 우계 성혼에 관해 쓴 논문을 모듬한 ‘우계학파 연구’(서광사 刊)에서 “우계학파는 아직 우리 학계에서는 생소한 이름이다. 그것은 그동안 우계 성혼의 사상과 그의 유학사적 위상이 율곡 내지 율곡학파에 가리워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라고 주장했다. 황 교수는 우계가 “사변적인 성리 이론보다는 유학 본래의 실천을 중시하고, 대의명분에 집착하기보다는 현실적 실리에도 눈을 돌리며, 자기 학설의 고집보다는 다른 학설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수양을 중시하고 마음공부를 강조해 온 하나의 큰 흐름을 볼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나아가 황 교수는 우계에서 이어지는 이들의 개방적 학풍, 탈사변적 학풍, 마음공부에의 몰두는 마침내 육왕(註:육상산과 왕양명) 心學(註:바깥의 ‘誠’이 아니라 내 안의 ‘마음’을 중시한 조선후기 성리학의 전반적 경향)을 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황 교수의 주장은 지난해와 올해 대규모 학술대회로 활발히 조명되고 있는 霞谷 정제두와 그가 개척한 ‘강화학파’ 등 조선 양명학의 完成이 우계학파의 전통에서 힘입은 바 크다는 논리로도 연결된다.  

황 교수는 율곡학파와 우계학파의 학문적 정체성을 구분짓는다. 우계가 20세, 율곡이 19세 때 학문적 동지로 약속한 두 사람은 평생 서로 아끼고 격려하면서 한국유학을 이끌고 정치적 운명도 함께했지만, 이념적 차이는 존재했다는 것이다. 1572년에 있었던 우계와 율곡 사이의 서신 왕복토론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황 교수는 주장한다.

▲황의동 교수 ©
이 책엔 우계학이 가능했던 여러 가지 배경들도 다뤄진다. 그것은 家學적 연원과 道學적 연원으로 나뉘는데, 창녕 성씨의 가학적 전통을 매죽헌 성삼문에서 찾는 황 교수는 그 특징을 “강렬한 충절의리”로 본다. 또한 16세기 초엽 기묘·을사사회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山門을 두드렸을 때, 정주학 전환기의 방향을 은거자수와 성현자기의 도학 군자풍으로 돌려놓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우계의 부친인 廳松 成守琛을 볼 때 “은거하여 자신을 지키고, 성현이 되기를 기약한다”는 것은 창녕 성씨의 가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게 황 교수의 설명.

도학적 연원은 우계를 가르쳤던 아버지 성수침이 도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조광조에게서 수업했고, 조광조는 김굉필, 김굉필은 김종직, 김종직은 김숙자, 김숙자는 길재, 길재는 포은에게로 거슬로 올라가는 도학의 正脈을 형성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성혼이 伯仁 권기에게 보낸 편지>

 뒤늦게 당신이 부모님을 모시고 남촌으로 피우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걱정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상세히는 모르지만 임시 거처지 생활은 편안히 정착되었습니까? 나는 근래 감기에 걸려 문을 닫고 움츠리고 지내다 보니 바깥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안부를 묻지도 못하니 무척 죄송합니다. 오직 부모님을 모시고 편히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편지를 올립니다. ©

황 교수는 우계학파의 사상적 특성을 개방적 학풍, 內聖的 학풍, 務實 학풍, 육왕학풍의 기반, 탈성리학적 경향 등에서 찾고 있다. 인맥은 우계 직계 문인이었던 윤황, 최기남, 강항, 안방준, 조헌, 정엽, 황신, 김집, 신흠, 이정구, 김상용, 이항복, 이귀, 이시백, 김덕령, 이수광 등이 있고 이후 윤선거, 윤순거, 윤증, 윤동원, 권극중, 권득기, 권시, 권이진, 최명길, 조복양, 최석정, 박세채, 박세당, 오윤겸, 정제두 등이 그 중심인물로 그려진다. 이를 볼 때 우계학파는 우계의 사위였던 윤황으로 옮아가 파평 윤씨, 전주 최씨, 우계의 문인이었던 신흠의 외손인 박세채가 속한 반남 박씨, 안동 권씨, 풍양 조씨 등에 걸쳐서 발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고 황 교수는 말한다.

▲ © 우계학파 연구 79쪽에서

▲이동희 교수 ©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학계의 여론은 조심스럽다. 지난해 4월 ‘우계 성혼의 성리설과 조선 후기 절충파’란 논문을 발표한 이동희 계명대 교수(한국유가철학)는 이 책의 출간에 대해 “우계학이라고 할만큼 뚜렷한 학문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이 교수는 “우계가 율곡과 친구이니까 논쟁은 했는데, 그것은 기대승과 퇴계가 벌였던 학문적 논쟁과는 성격이 틀립니다”라고 강조한다. 즉, 우계가 볼 때 퇴계의 설이 맞는 부분이 있어 친구인 율곡에게 “나는 철학에 소질이 없어 논리적으로 설명을 못하겠으니 친구인 당신이 철학을 잘 아니까 설명을 좀 해주소”라고 편지를 낸 것이고 “답신을 받은 우계가 ‘의문이 다 풀렸소’라 한 게 아니라 여전히 의문이 남소라고 했던 것이죠”라고 말한다.

이 교수는 우계가 학문담론 속에서 인정받은 것은 정치적인 측면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덧붙인다. 동인과 서인이 심하게 으르렁거릴 당시 김창협, 김창흡, 박세채, 조성기로 이뤄진 ‘절충파’에 의해서 말이다. 즉, “농암계 사람들이 논쟁을 하다보니 지성이 발달해서 스승인 율곡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 거라. 가만보니 퇴계의 설이 그르다고 할 수 없으니 반성을 한 겁니다. 율곡은 인간의 도덕문제를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는 데 치우쳤거든. 퇴계의 호발설이 일리가 있고, 그걸 지지한 우계설도 지지를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소론 쪽에서는 율곡을 도그마틱하게 계승하는 계통이 싫었던 것입니다”라며 ‘당파성’의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고영진 교수 ©
하지만 이런 의견에 대해 고영진 광주대 교수(조선사상사)는 강하게 반발한다. "그렇게 따지면 서경덕의 화담학파도 마찬가지고, 조선시대엔 퇴계와 율곡만 남는다"는 것. 그는 "우리 사회가 하도 양극화, 뚜렷이 드러나는 극좌, 극우에 너무 익숙해가지고 마치 사상도 뚜렷해야지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봐왔습니다"라며 "이런 의식이 과거에도 투영되어서 퇴계와 율곡처럼 명확하게 한 사람들만 제대로 철학한 사람들로 보는 데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고 교수는  "소론이 노론에서 뛰쳐나와 자기정체성을 만들어나가면서 이으려고 했던 것이 성혼이죠. 안방준 같은 경우 ‘혼정편록’ 등 수많은 책을 통해 성혼의 학문을 정리하고, 합리화하는 작업을 했습니다"라고 말을 잇는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퇴계도 모자란 부분이 있고, 율곡도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 이른바 '절충파'들에 대한 재조명을 전면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게 고 교수의 입장이다. "이론적인 불완전성"을 들어 인정하길 꺼려하는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 불완전성이야말로 '양극단'에서 벗어난 '합리적 이성'이라는 것이다. 고 교수는 "가장 후진적인 분야가 사상사 분야입니다. 조선시대 당파성을 넘어서지 못하죠. 자기가 송시열했으면 송시열주의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라고 철학계 전반에 비판을 던지기도 한다. 현재로선 조선시대 사상사 분야를 제대로 연구하려면 당파성, 지역성, 학연에서 벗어나 누구든지 도기할 수 있는 '사상사 연구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굉장히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하게 덧붙였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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