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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3)정범모論에 대한 비판적 분석
특집: (3)정범모論에 대한 비판적 분석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10.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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工學的 교육론 비판 … 이분법적 논의전개 문제

정범모 교수에 대한 학계의 입장은 일관적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찜찜함을 안겨주는 천편일률성을 보인다. 정 교수의 제자들은 그에 대해 “미국 심리학의 행태주의적 접근을 도입해 교육과정·평가의 내용과 틀을 만들고, 개발론적인 관점에서 인력양성의 국가적 프로세스를 주도해나간 한국 교육과학의 鼻祖”로 평가하고 있다.

제자들 및 우호적인 학자들은 정 교수가 후기로 가면서 교육통계나 평가 같은 양적인 접근에서 관심을 돌려 “교육학에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영역을 끌어들이는 교육철학자적인 면모”를 보여줬으며 “그 단계 한국교육계에 결여된 부분을 민감하게 포착하고 앞서서 방향을 열었다”고 정리한다.

가령 고희 기념 논문모음집 중 한권인 ‘정범모의 교육론’(나남출판 刊)의 서론을 쓴 이돈희 서울대 교수는 “한국의 교육학이 그의 영향 하에 있어왔다고 보는 것은 오늘의 교육학적 성숙이 그가 일깨운 관심사에서 시작되었고, 그가 제기한 문제들을 중심으로 연구주제들이 설정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면 정범모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한국 교육학을 너무 미국 일변도 학문으로 만들었고, 학문적 객관성을 비교적 쉬운 방법으로 얻는 통계 중심의 적성검사가 교육학의 전부인 줄 아는 적성만능주의를 한국행동과학연구소와 한국교육개발원 등으로 제도화하고, 여기서 길러진 인력을 대학으로 송출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교육의 정신적 측면, 학문적 완성도를 중시하는 연구자의 윤리를 내면화하는 훈련에는 소홀했다”고 비판한다. 즉, “교육학 책 중에 서가에 꽂을 게 얼마나 되나”라는 自嘲를 부를 정도인 교육학의 학문적 미성숙의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이가 1968년 정범모의 제자인 이홍우 서울대 명예교수와 논쟁을 벌인 적도 있는 이인회 연세대 명예교수인데 그는 “삶 전체의 의미구조를 교육적인 측면에서 해석해야 한다”며 교육에 대한 공학적 접근을 내세운 정범모와 맞섰다. 또한 故 이규호 연세대 교수는 정범모가 말하는 교육학의 연구대상에 “인간사회의 다양한 규범적인 측면도 포함해야 된다”는 측면에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 대해 정범모는 “과학하는 사람에게 과학만 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어색”하다는 반론을 펼친 바 있다. 이 말이 일리가 있다면 제대로 된 비판은 정범모가 주도한 미국식 교육과학의 학문적 숙성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이뤄져야 할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적절한 검토가 이뤄지지 못한 듯하다. 표준화검사의 예를 들며 “신뢰도, 타당도, 변별도의 삼박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타당도’ 부분을 검증하려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는 비판 정도가 유일하다. 물론 정범모의 제자인 김상호 중앙대 교수에 의해 ‘타당도’를 검증하려는 노력이 나중에 이뤄지기는 했다.

그 후 비교적 최근에 이뤄진 정범모에 대한 논의는 최성욱 목포대 교수의 ‘교육발전론 재검토’(1997), 이용남 전남대 교수의 ‘한국 교육학의 두 전형 비교’(1997), ‘현행 한국 교육학의 성격과 문제점 분석’(2004), 이학주 경인교대 교수의 ‘우리 교육학의 빈곤, 또는 풍요’(2003), 유재봉 성균관대 교수의 ‘정범모의 교육 개념에 대한 비판적 논의’(2004) 등이 살펴진다.

최성욱 교수는 교육발전론이 교육을 학교 중심으로 파악하며, 한 국가의 제반 발전의 필요와 직결시켜 종합적으로 계획·운영하려는 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또한 학문의 가치를 현실처방적인 데서 찾기 때문에 기초학문보다는 응용학문과 정책학문에 초점을 맞추며, “학교체제를 통해 실용적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이라는 일반인들의 통념적 교육관을 정확하게 대변한다고 분석한다.

이런 분석을 토대로 최 교수는 “정치발전 같은 이질적 과정들을 교육과 동일시하게 되는 큰 원인은 교육을 그 자체의 고유성에 근거하여 파악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이는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게 중요하지, 좋고 나쁘고를 따지는 게 아니라”는 정범모의 교육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정범모 식의 교육학을 ‘국가발전’과 지나치게 묶어놓으려는 강박의식이 작용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국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좀 잘먹고 사는 데에 교육도 한몫을 해야한다”는 1세대 교육학자들의 신념과 후학들의 비판 사이에 가로놓인 어떤 단절감을 극복하는 일이 교육발전론을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용남 교수는 한국 교육학의 패러다임을 정범모의 입장과 그 제자인 장상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제시한 입장으로 대별시키면서 정범모에 대해 “교육을 명확히 정의함으로써 그 이외의 것을 교육에서 제외하는 결과를 낳을 위험성이 있다”라고 비판한다.

그에 비해 “교육의 개념화는 종착과 정답이 없으며, 그것을 탐구하여 가르치는 下化者와 배우려는 上求者의 타증과 자증에 의해 잠정적으로 판별되는 것”이라는 장상호의 주장에 대해서는 “객관적 진리를 거부하는 초월적 입장”이라 정리하면서 “교육의 개념 탐구를 교육학의 영원한 탐구로 제시했다”고 평가한다.

이 교수는 “정범모에게 교육은 인간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이론들의 집합이며 장상호에게 교육학은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의 해답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결국 “교육학이 철학이냐 과학이냐”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만든다.

하지만 이런 류의 대립보다는 “교육학은 과학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다”는 정범모의 共存·병립의 입장과 “교육학이 경험적 결과에 토대를 둔 행동과학의 하나로 간주되는 것에 ‘반대’”하는 장상호 입장의 대립이 더 중요해 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장상호의 입장이 교육을 과학으로 환원하는 주의자들에게는 적절한 비판적 관점이 될 수는 있을지라도, 정범모 식의 공존론 앞에서는 오히려 배타적 성격을 드러내며 고립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이학주 경인교대 교수는 ‘우리 교육학의 빈곤, 또는 풍요’에서 정범모 교수가 “교육을 위한 교육의 정의가 아니라 과학을 위한 교육의 정의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라며 행동의 변화를 다루는 행동공학이 교육의 학문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또 “형이상학이라는 본질의 부정이 가져온 재앙은 공학적 모형이 가져다주는 어떤 이득으로도 상쇄하지 못할 만큼 치명적”이라고 비판한다. “수단적 교육관을 조장해 교육을 대중의 천박하고도 즉흥적인 이해에 종속시키고, 나아가 정치·경제논리 등 온갖 비교육적인 논리의 도구로 전락시킨 점 등은 아무래도 교육에 대한 일종의 배신”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도 아주 쉽게 되치기를 당할 수 있다. 비록 현실 교육의 지리멸렬함의 원인이 정범모 교육학에 돌려지면서 그 반대편이 쉽게 설득력을 얻는 듯 보이지만, 이 교수가 내리고 있는 류의 판단 또한 하나의 교육학이 주류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급한 인식론과 해박한 논리를 갖춘 여타 학문들과 교육학이 어깨를 나란히 해야한다는 ‘학문의 자율성’에 대한 모호한 욕망에서 비롯되고 있는 듯하며, 그것은 교육학의 통시대적 보편성이라기보다는, 정범모 교수가 늘 강조하듯 시대적 필요성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교육학의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는, 행동과학에 대한 비판적 논구들 속에 교육학의 ‘고유성’을 구체적으로 추상화해내는 사례는 매우 드물어  ‘공리공담’이 적지 않다는 것도 지적될 수 있을 듯하다.

▲정범모 교수 ©
따라서 정범모가 1968년 ‘二分論 克復을 위한 散策’에서 “흔히 문제를 과학적 방법만으로 궁극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느냐라는 식으로 설정하는데, 이것은 ‘그렇다’고 대답하면 거짓이 되고 마는 ‘강조의 허위를 강요’하는 설문방식”이라고 지적한 바대로 “교육학의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식의 문제설정 또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신화적, 예술적, 과학적 이해방식의 順次와 복잡한 그물망을 애써 외면한 채 논의를 단순화해서 결론을 빨리 이끌어내려는 성급한 태도로 비춰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정범모라는 이름 석 자를 제목에 집어넣은 유재봉 성균관대 교수의 논문은 다소 실망스러운데, 이는 정범모의 교육개념에 대한 이학주 교수의 선행연구를 리바이벌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도 이미 늦은 판국에, 나왔던 비판을 되풀이하고, 그것도 이미 1950년대에 충분히 그 시대적 소임을 다하고, 이제는 교육에 대한 여러개의 정의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도 될 정범모의 교육에 대한 정의를 불필요할 정도로 강하게 문제화하고 끝내는 식의 논문산출은, 행동과학으로서의 교육학을 비판하는 논문들이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인식 없이 상대를 바라보는가 하는, 그 ‘비판의 토대’에 逆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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