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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학술쟁점_지향적 진화 모델로서의 NIS론
해외학술쟁점_지향적 진화 모델로서의 NIS론
  • 김태억 리즈대 박사
  • 승인 2005.10.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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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만, 넬슨, 그리고 룬트발에 의해 국가혁신체제(NIS)라는 개념이 소개된지 20여년이 흐른 지금 NIS론은 OECD가 매년 제시하는 과학기술정책 관련 권고안을 비롯해 세계 주요국가들의 과학기술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 결과 NIS는 누구에게나 친숙한 단어가 됐다. 그러나 익숙한 유행어가 대개 그렇듯이 이 단어가 지칭하는 실체에 대해선 모두 제각각의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가령 NIS를 자신의 입론으로 삼는 논자들 가운데서도 NIS에서 글로벌시대에 국가의 위상과 역할이 어떻해야 할지에 대해 서로 다른 답변을 내놓는가 하면, 국가역할이 강조돼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어떤 영역에 주목해야 할지에 대해선 이견을 보이기도 한다. 그 결과 NIS론을 대표하는 두 논자, 룬트발과 에디퀴스트는 한 권의 책, ‘혁신에 관한 옥스포드 참고서(The Oxford Handbook of Innovation)’(2005)에서 NIS론의 향후 발전전망, 이론적 과제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두 논자간의 논쟁이 아직 본격화되진 않았지만 논점 자체는 인화성이 무척 높은 것들이며, 게다가 NIS론을 이론적 기반으로 삼아 진행돼온 참여정부의 과학기술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판단돼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측면이 고려돼야 한다.

첫째는 이론이 정책의 영역으로 들어갈 경우 벌어지는 이론적 개념의 오염현상이다. 정책결정의 영역은 이론적 논쟁의 장이 아니라 권력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정치적 담론의 영역이다. 여기에서는 참여자 모두가 이론과 개념이 허용할 수 있는 한계내에서, 혹은 그것을 넘어서 최대한 해석의 자유를 추구하게 된다. 기실 OECD가 NIS론을 방법론적 토대로 삼은 이유 중 하나는 개념의 모호성으로 인해 각국 정부에게 제공할 수 있는 해석의 자유도가 높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선진국의 정부정책에 대해 많은 정치-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OECD는 매년 NIS론의 논지를 조금씩 변화시켜오고 있다. 가령, OECD가 2002년에 발표한 ‘Dynamising NIS’의 경우는 국가혁신 체제의 동학적 효율성을 위해 시장기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올해 발표 예정인 ‘Growth and Productivity(가제)’는 혁신적 기업가 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조세 및 규제완화를 권고하는 한편 시장기제의 정상적 작동을 위해서는 진입퇴출이 자유롭게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런 요인들이 NIS의 발전적 성숙을 위해 중요하다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시장경쟁 기제가 전면에 나서게 될 경우 국가의 역할이 뒤로 밀려나면서 혁신기반 조성자로 국한되거나 혹은 혁신기반 조성조차 그 성공적인 실행을 위해서는 시장경쟁의 논리에 충실해야 되는 상황이 빚어질수도 있다. 과학기술 관련 투자총액 중 정부부문이 30% 내외를 넘지 않는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 이러한 위험성은 더욱 높아진다.

그러나 애초에 NIS론을 제기했던 프리만이나 룬트발은 기업이 혁신의 주체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시장이 아니라 국가를 혁신체제의 3대 중요요소 중 하나로 전면에 내세웠다. 시장경쟁의 논리를 넘어선 경제발전-기술혁신의 논리, 즉 시장경쟁을 통한 요소자원의 재조정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인적자원, 산업구조, 상호학습에 기반한 지식역량, 기초 인프라와 제도적 요인을 강조했던 리스트의 경제사상을 진화주의 경제학 이론과 결합한 결과가 바로 초기 NIS론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룬트발이 앞서 소개한 책자에서 거듭 강조하는 NIS론의 핵심 역시 이것이다. 특히 발전도상국가들이나 저개발 국가가 지식기반 혁신체제를 통해 경제발전을 이루는데 필요한 정책적 과제들이 무엇인지를 NIS론이 제공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룬트발은 특히 인간적 가치 혹은 웰빙의 개념과 경제발전이라는 개념을 연관지으려던 경제학자 아마타야 센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여기에 상호학습을 통한 역동적 지식기반을 결합함으로써 전 국민적인 혁신역량을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NIS의 핵심임을 주장하고 있다.

둘째, 에디퀴스트가 자기비판하듯이 NIS론의 이론적 불명료함도 개념의 혼란을 만들어낸 주요 원인 중 하나다. NIS론이 혁신체제의 시스템적 성격을 강조하면서도 무엇이 시스템 구성의 핵심요인인지, 핵심요인들간의 구조적인 상관-인과관계는 무엇인지, NIS의 진화를 규정하는 법칙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정식화한 연구성과를 찾기는 어렵다.

특히 혁신주체가 기업이란 점을 인정한다면, 개별기업들이 혁신과 관련한 동학적인 행태를 분석하고 이를 시스템 차원에서 국가로 연결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의는 기업루틴이라는 보수적인 개념에 가둬져 있다. 루틴이라는 개념은 정의상 외부변화에 대해 둔감해야 하고, 루틴에 기반한 변화는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것이다. 여기에 동학적 상호학습,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탐색으로서의 R&D활동을 추가한다 해도 이론적 효과는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활동의 결과가 기업역량으로 전환되기 위해선 이미 형성돼있는 루틴이라는 터널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시장실패’나 ‘시스템 실패’ 역시 개념이 모호하긴 마찬가지이다. 특히 그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따라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국가의 개입보다는 명확한 소유권 확립을 해법으로 제시하거나 다양한 민간 중개전문기관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거래비용을 줄이는 시장적 해법이 더욱 적절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NIS론에서 주장하는 시장실패·시스템 실패로는 국가개입의 필요성을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NIS론의 문제는 앞서 지적했듯이 시스템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의 동학적 체계, 내적구성 요소간의 상호관계 규정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럴 경우 국가개입의 필요성을 제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개입의 경로가 분명치 않게 된다. 개입을 위해서는 시스템 작동의 원리, 핵심변수, 변수들의 동학적 행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론적 분석이 없이 개입을 과도하게 강조할 경우 직접적인 규제와 직접적인 지원, 즉 권위주의적 국가개입주의가 나타나게 되고, 그 반대편향으로 대중에 영합하는 파퓰리즘, 혹은 시장제일주의로 반동할 수도 있다.

물론 에디퀴스트는 이런 진단을 과도한 것이라 여길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시스템 구성요소들을 정확히 정의함으로써 NIS론이 갖고 있는 모호함을 해결하고자 한다. 에디퀴스트는 국가혁신 체제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로, R&D, 경쟁력 형성, 새로운 제품시장 형성, 사용자 수요예측, 조직의 창조 및 변화, 지식을 둘러싼 네트워크, 제도의 창설 및 변화, 혁신배양, 혁신금융, 그리고 컨설팅 서비스라는 10가지를 시스템 구성요소로 제안하고, 이들간의 연관관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혁신역량이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룬트발은 에디퀴스트의 제안에 대해 “10개의 구성요소는 지나치게 많다. 이론의 발전은 단순화를 지향해야 한다”라면서도, 동시에 왜 “경쟁, 국제적인 무역 및 자본이동에 대한 개방성, 노동시장의 역동성, 사회적 분배 및 복지”는 시스템 구성요소로 포함하지 않았는지 투덜거렸다. 더구나 룬트발이 지적하고 있듯이 에드퀴스트가 제안한 10대 구성요소들은 추상수준이 다르고, 시스템의 기능적 구성요소들인 기반, 중추, 매개, 조정과 관련해서 위에서 열거한 10개 항목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불명확하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10개의 구성요소들에 새로운 다섯가지 요소를 더 추가하든 빼든 크게 다른 결과를 얻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시스템의 전체적인 구조와 그 구성요소들간의 상호작용 메커니즘이 밝혀지지 않는 한 혁신역량을 설계하는 경로와 방식은 항상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려있게 되는, 상황논리의 포로가 되기 쉽다. 결국 첫 번째 문제인 정치적 담론의 과잉 속에서 개념적 명확성을 잃어가게 되는, 그래서 어떤 구성요소들을 추가하고 강조하느냐에 따라 실제 정책이나 그 정책효과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곤란한 상황으로 다시 회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NIS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해진 셈이다. 룬트발의 제안대로, (그가 말하는 ‘지식기반론’은 논외로 한다) 혁신체제 구성요소들을 선택목록으로 만들기 보다는 시스템론 자체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혁신체제론이 세워진 철학적 기반, 즉 경제발전의 목표와 가치를 명확히 하고, 이러한 철학과 가치가 혁신시스템의 핵심적 운영원리로 작동할 수 있는 이론체계를 구성해야 한다. 하지만 철학과 가치가 구호가 돼 정책의 전면에 나서는 방식은 안된다. 시스템 진화의 내적 규칙성을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규칙성들을 활용해 시스템 진화의 방향을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한 사회의 가치사슬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예측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 기업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행태를 분석하는 것에서 시작돼야 한다. 혁신체제의 미시적 분석이야말로 NIS론을 자연발생적 진화로부터 지향적 진화로 바꾸는 출발점이 아닌가 싶다.

김태억 / 영국통신원·리즈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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