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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번역과 탈식민의 모색
[좌담] 번역과 탈식민의 모색
  • 교수신문
  • 승인 2001.06.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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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8 09:41:22
번역을 통한 탈식민의 모색은 모순된 씨앗들을 함께 품고 있는 프로젝트이다. 학술문화적 자생성을 기르기 위해 원전들을 우리의 정신문화적 자산으로 옮겨놓는다는 생각 자체가 논란의 여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담에서 논의되었듯이, 번역이란 언어적으로 불안정한 '나'가 안정적이고 완벽한 외국어 텍스트를 만나서 변화하는 모습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현장에서 잦은 지적 사대주의와 원전숭배, 그리고 전문가주의의 벽은 번역의 시대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가능하다는 것이 이번 좌담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 권보드래 서울대 강사(국문학), 전호근 전통연수원 교수(철학)의 말을 통해 번역의 시대를 통과하려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그려보기 위해 이 자리는 준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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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보드래(이하 ‘권’): 번역은 지식의 기초쌓기이며 지식 전반에 대한 반성의 기반이다.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 자체가 거의 번역의 산물이다. 매일 대하는 어휘들도 오랜 세월 의미망을 통과해온 것들이다. 가령, 독일어 ‘빌둥(Bildung)’을 우리말 ‘교양’이라고 번역했을 때 생기는 의미의 괴리를 생각해보자. 내가 아닌 외부의 것들을 어떻게 내 안에 스며들게 하면서 새로운 맥락을 구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강내희(이하 ‘강’): 우선 번역에 대한 평가문제를 이야기하고 싶다. 미국서 중문학 연구자가 논문으로 번역을 제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 문헌을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미국의 학문기반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학문기반 형성작업에 인정과 평가를 해준다는 말인데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넓게 보자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는 학문이 종속되어있다는 단적인 예다. 결국은 외국학 관련의 지식생산이 전문가중심으로 이뤄져 지식민주화, 지식대중화의 인프라를 체계적으로 구축하지 못하게 만든다. 배타적으로 전문지식을 독점하려는 태도가 한국 학계의 문제다.

번역서·원서 가치 동등하게 인정해야

전호근(이하 ‘전’): 동양철학에서는 원전텍스트의 진위가 오히려 문제시된다. 문헌학이나 서지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열심히 번역한 성과 자체가 한순간에 무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서지학, 문헌학은 ‘3D학문’이고 그 성과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이들이 10년간 연구한 결과가 연구자들에게 넘어오면 그냥 10년을 앞서게 되어, 어떻게 보면 쓸모없는 논문들에 비해 월등히 도움되는 작업임에도 창조적인 연구만 인정받는다. 번역을 위한 지식 인프라를 구축하는 작업인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

권: 번역이라는 것이 고되기만 하고 빛이 나지 않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은유적으로 보자면 모든 인식행위란 번역작업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언어를 내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니까. 번역하는 쪽에서 오히려 지식의 근본적인 화두같은 것을 생산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번역자가 역사적 맥락에서 무수한 단어를 움켜잡았을 때 맞닥뜨리는 당혹 같은 것이 중요한 출발점일 수 있다.

강: 전문 번역인이 현장에서 느끼는 번역의 문제는 이론적인 것과는 다르다. 최근 들어서야 번역이 이론적으로 부각되고, 번역이라는 ‘현상’에 대해 중시하게 됐다. 과거에는 번역을 기술적인 부분으로만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 번역의 문제를 메타담론으로 전개한 것은 번역학이 등장한 이래 최근의 일이다.

권: 번역학이라는 새로운 학문분야의 출현은 다문화 시대와 따로 존재할 수 없다. 다문화시대라는 인식 자체가, 저쪽에 정해진 원전이 있고 어떻게 올바르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인식구도를 근본적으로 깨야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사실 외국어 단어들도 그곳에서는 불안정하다. 어떻게 보면 이 불안정성은 모든 존재의 속성이다. 번역이라는 것도 완전한 존재와 그것을 완전하게 담아내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나와의 만남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불완전한 상태에 놓인 존재들 사이의 대화여야 하지 않을까. 넓게 보면 번역은 사유구조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다. 사소한 예로는 일본어로서의 이태준 소설, 독일어로서의 김승옥 소설이라는 생각도 감히 하게 된다. 그들이 한국어처럼 보이는 문자체계를 활용하고 있다고 해서 오로지 한국어라는 독립된 공간 안에서 노닐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보편적인 상황이기도 하다. 오로지 고립된 ‘나’로서만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을까 한다.

강: 번역이 하나의 단일한 언어체계에서 또 하나의 단일한 언어체계로 코드전환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번역자는 두 개의 언어 사이에 서로 차이가 느껴지도록 전환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번역자는 갈라진 말, 다시 말해 ‘單聲’이 아니라 ‘多聲’으로 자신의 담론을 구축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보면, 번역이 반드시 우리말다워야 한다는 신화는 오히려 원전의 생기를 잃게 한다. 적당한 이질감이 번역된 텍스트에 남아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전: 실제 동양학에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완전번역’의 문제가 제기됐다. 개인적으로는 완전히 풀어버리는 번역과 원전에 충실한 번역을 이원화시켜서 생각하고 있다. 그 두 가지를 하나의 틀에 담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가령 논어를 번역한다고 했을 때, 하나는 주석이 하나도 없는 것, 하나는 주석이 많이 달린 것, 즉 전문가용과 대중용을 구분해야 한다고 본다.

강: 시장이 요구하는 번역과 연구자를 위한 전문가들의 번역은 다르다. 전문가로 하여금 번역을 많이 하게 해야한다. 그것은 전문가를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대중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북한의 경우, 셰익스피어 번역이 상당한 수준에 있는데 대중들의 취향에 적합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번역을 했다. 전문가의 입장에서는 원전의 흔적을 지워버렸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겠지만, 셰익스피어의 세계를 번역에 의해서라도 접근한 사람과 아닌 사람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를 것이므로 그런 식의 번역도 나쁘지 않다.

권: 연암의 글을 강의했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의 번역으로는 그 발랄하고 생기넘치고 장난스럽기도 한 글이 도저히 학생들에게 전달이 안됐다. 차라리 원전에 충실하려는 생각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요즘의 문체와 언어로 얘기를 해주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전히 이것이 그 원전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강: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해야한다는 말은 빗나간 지적일 수 있다. 물론 오역은 비판받아야 하지만, 번역이 일반적인 관행으로 되어 있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의 차이를 짚어주는 것이 보다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지식대중들에게 필요한 책은 거의 자기말로 번역되어 있다. 석학들의 글을 보면 자신이 소속된 언어권의 번역서가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다. 그렇게 본다면 번역이라는 것은, 이런 말은 쓰기 꺼려지지만, 사회적 힘을 보여주는 지수다. 번역의 정확성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번역의 시대를 거쳐가는 것 자체가 사회적 능력이라고 본다.

他 번역본 무시, ‘원전’과 ‘나’만 존재

권: 사실 19세기말 20세기초의 한국어로서는 외래의 관념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 굉장히 재미있다. 예컨대,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희한한 말이다. 당연히 ‘democracy’의 번역어인데, 애초에 중국의 한 선교사가 이것을 ‘民主’라고 번역했다. 과격한 말이라서 오랫동안 쓰이지 않다가 이후에 ‘주의’라는 단어가 붙으면서 정착됐다. 가령 ‘aristocracy’는 ‘귀족정’으로 번역되어 이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지만, 민주주의는 이것만이 ‘이념’으로서 확보할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체제라고 느껴지게 됐다. 그런 사정을 들여다보면 번역이 제대로 안되어 있다는 지적도 적절하지만, 근본적으로 근대의 언어는 번역되었고 외래문화와의 만남을 겪으면서 변했으며 알게모르게 우리의 역사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의식을 규정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강: 번역자의 입장에 따라서 번역어에 심으려는 뜻이 달라지기도 한다. 번역어를 사용하는 개인 혹은 집단이, 소속된 사회에서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통용여부가 결정된다. 번역자의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세력에 의한 통용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근대초기 불안정한 번역어의 선택이라는 것은 다양한 세력들간의 다툼의 과정이다. 서구에서 기원한 하나의 개념을 한중일 삼국에서 끌어들이면서 정치적 입장이 다른 세력들 간의 사회적 열망과 해석을 담았던 것이다.

실명 번역비평 활성화 기대

권: 그렇게 탄생한 근대국어는 사실 인공의 언어이다. 근대초기 한중일 삼국에서 번역은 한편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문제였다. 저쪽 것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는 ‘나’란 질문을 수반하기 마련인데, 이 ‘나’ 라는 것이 불명료한 상황에서의 고투를 기억하면서 보면 번역문제는 더 흥미로울 것이다.

전: 번역자들에게는 뿌리깊은 악습이 있다. 번역하면서 그간 축적된 성과물을 일거에 없애버려 기존의 맥락은 소실되어 버린다. 일본이나 현대 중국은 그렇지 않다. 원문직역본, ‘通釋’이라고 해서 원문의 직역을 부드럽게 풀어낸 번역, 거기다 주석을 달아놓은 번역에 탁월한 학자들이 평생을 매달려서 번역본의 계보를 만들어간다.

강: 원전을 읽는 능력이 지식인들의 ‘재산’이기 때문에 소모적인 구습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요즘은, 실명비판은 어렵지만 번역비평이 조금씩 거론되고 있어 희망적이다. 가령 ‘안과밖’이라는 반년간지에서 영문학 원전번역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여론은 실명으로 번역비평을 하자는 방향으로 형성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렇지는 않다. ‘내가 본 오역’과 같은 지면을 활성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보다 번역의 정확성을 따지거나 논쟁을 할만큼 지식인프라가 없는 것이 더 문제다. 진행·정리 이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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