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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
  • 최승우
  • 승인 2022.01.03 1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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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렬 지음 | 그물 | 848쪽

“진정한 탐험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여행하는 것”이라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명언에 따르면, ‘진정한 역사 탐험은 새로운 눈을 가질 때 가능할 것’이다. 이 책은 식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풍경을 넘어서서 자유주의와 의회주의라는 ‘눈’을 통해 한국근대사를 재조명했다.

역사는, 분열될 때 반동화되었고 통합될 때 진보했다.

“진정한 탐험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여행하는 것”이라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명언에 따르면, ‘진정한 역사 탐험은 새로운 눈을 가질 때 가능할 것’이다. 이 책은 식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풍경을 넘어서서 자유주의와 의회주의라는 ‘눈’을 통해 한국근대사를 재조명했다.
한국 근대사는 식민지, 분단, 전쟁이라는 난관을 넘어왔다. 큰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 내부의 사정을 고려한 내재적 시각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국제질서의 변동을 고려한 외재적 관점 역시 중요하다. 양자의 균형이 상실되면 역사이해의 적절한 포인트를 잡기가 어렵다.

근대문명의 이식과 교류하는 관점을 가진 식민주의가 조선의 정체성 혹은 식민지근대성이라는 우상을 만들었다면, 항일무장투쟁을 신성시하는 민족주의는 이상적인 도덕적 기준을 가진 민족주의와 분단의 원인은 외세이고 친일세력이라는 우상을 만들었다. 식민주의는 조선의 정체성을 과장하고, 다양한 근대문명의 수용 루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이식을 강조한다. 이른바 ‘비타협적 운동’을 전개한 급진적 민족주의는 자신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기 위해 국민적 혹은 세력의 분열을 마다하지 않았다. 분단의 고착화와 전쟁의 발발은 민족주의의 분열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이념이 들어오면서 민족주의는 이념적 분열이 일어났고, 점점 더 그 양상은 심각해졌다. 우리 손으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한 우리는 이러한 불편한 사실을 외면한다.

부분적으로 타협적인 온건한 민족주의는 국제질서를 의식하면서 민족주의의 협력을 모색했지만 결국 내적 또는 외적 장애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타협과 통합을 통해 3·1운동을 주도했고 분단국가 대한민국 발전의 토대를 놓았다.

개항 이후 농업관료제로부터 자유로운 호남지역의 진취적 지주는 온건한 민족주의를 추동했다. 그들은 조선왕조의 엘리트인 기호지역의 관료적 지주들이 식민지 지배체제 내로 편입될 때 실질적으로 한국의 근대화를 담당하는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독립적인 부르주아지로 성장했다. 근대화에 성공해서 제국주의가 된 일본의 상층 지주가 군국주의의 부속물이 되었다면,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의 상층 지주는 영국의 부르주아지와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상층 지주(와 관련된 상업적 농업)의 역할과 관련하여 유럽·중국·일본과의 비교를 통해 한국의 사례가 갖는 의미를 밝혔다. 온건주의를 추동한 또 하나의 힘은 개항 이후 들어온 기독교였다. 고종은 기독교가 들어오는 문을 열었고, 대한제국의 국권이 흔들리는 과정에서 기독교 신자가 증가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기독교(개신교)가 가장 빠르게 확산된 지역이었다. 자연스럽게 기독교 민족주의는 항일운동의 주요한 구심점이 되었다. 호남의 지주와 기독교 세력은 천도교 세력과 협력하여 3·1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시민적 민족주의는 제헌헌법 그리고 농지개혁에서 다시 잠재력을 발휘했고, 이승만정권이 독재에 대항하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들은 급진적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을 이용하면서 통일국가를 수립하려고 했다. 비타협적이었던 급진주의적 민족주의는 반동적 결과를 가져왔다면, 온건주의가 사회의 진보를 이끈 것은 한국근대사의 숨겨진 사실이다. 우리는 갈수록 심화되는 작금의 역사인식의 분열 속에서 두 개의 우상을 옆으로 치우면 실질적으로 한국근대사를 지탱한 감춰진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독자는 한국 역사의 진정한 탐험을 위한 새로운 눈을 발견할 것이다. 이 밖에도 독자들은 이 책에서 우리 역사를 새롭게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첫째, 유럽·중국·일본과의 비교를 통해 농업관료제와 관료적 상업체제 위에서 운영된 조선왕조의 장기지속의 배경과 원인이다. 낮은 세금과 적은 군사력으로 안정적인 대외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선왕조는 500년 이상을 유지했다.

둘째, 재조명된 민족운동의 타협 대 비타협의 구도다. 궁극적으로 분리와 독립을 지향하는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은 국제질서의 변동에 유의하면서 독립을 준비했고, 현실은 그들이 희망대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전체주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의회주의와 공화주의를 견지했다.

셋째, 통일민족국가의 실현에 관한 것이다. 모스크바삼상회의의 합의를 실행한 세력은 이른바 상층 지주가 많았던 온건한 민족주의 정당인 한민당이었다. 신탁통치를 거부하고 미소공위를 실질적으로 파탄시키면서 당장의 독립을 외친 급진적 민족주의는 분열과 분단의 길, 나아가 전쟁의 길을 열었다.

넷째, 사회가 통합될 때 국가와 사회는 발전했고, 분열될 때 반동적 세력이 득세했다. 제헌헌법과 농지개혁에서 구현된 통합적이고 다원적이며 포용적인 제도는 대한민국이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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