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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넘게 지속된 낡아빠진 우상을 땅에 묻을 시간인가?
1세기 넘게 지속된 낡아빠진 우상을 땅에 묻을 시간인가?
  • 양창렬 프랑스통신원
  • 승인 2005.10.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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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논쟁_ 프랑스, 정신분석학이냐 행동-인지주의 정신치료냐

프랑스의 정신의학자는 대략 1만3천7백50명 정도(70%가 정신분석학적 경향)이고, 그밖에 심리학자나 정신요법의사는 8천2백50명에서 1만4천명에 이른다. 전자만 따질 경우, 프랑스에는 주민 7천5백명당 1명의 정신분석의가 있으며, 후자를 포함할 경우, 4천1백명당 1명의 정신분석의가 있게 된다. 4만5천명당 1명의 정신분석의를 가진 미국과 비교한다면, 프랑스에서의 정신분석학의 위치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종주국이라 할 만한 프랑스에는 그것을 비판하는 담론들도 끊이지 않았다. 사르트르, 들뢰즈와 가타리, 푸코 등은 대표적인 예다.

지난 9월 1일, "프로이트 없이 살고, 사유하고, 건강해지자"라는 부제를 단 ‘정신분석학 흑서’가 프랑스내 정신분석학 경향에 대한 대대적 비판을 감행하며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8백30쪽에 이르는 이 두꺼운 책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인식론적, 철학적, 정신요법적 비판들 뿐 아니라, 정신분석치료 과정에서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 환자나 주변인들의 증언들까지 망라하고 있다.

이 책의 중심에는 미국에서 발전된 행동주의적 -일정한 환경에서의 자극과 그에 대한 관찰 가능한 반응에 주목- 이고 인지적인- 인간의 마음을 정보 처리하는 인지체계로 간주, 인지과정에 대한 단계적 분석- 정신치료 경향의 정신의학자들이 있다.

‘르 푸앙’(Le Point)지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정신분석학자 자크-알랭 밀레르는 본 논쟁의 쟁점이 '정신적인 것을 매매'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논박했다. 지난 2003년에는 정신치료사 자격증에 대한 대대적인 조정을 위한 아쿠와예법이 통과됐으나, 아직 시행안이 마련되지 못한 상태이며, 2004년 6월 프랑스 국립 보건 의학 연구소(INSERM)의 보고서는 행동-인지 치료가 '관계주의적인 심리치료'(곧, 정신분석학)보다 효과적이라고 발표했다. 이처럼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학술적인 차원에 국한되기 보다는, 의료보험체계의 위기에 봉착한 프랑스 정부의 대책 마련과 맞물려 있다. 즉, 어떤 치료 방식이 '효율적'이고, '저렴한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쟁점은 정신분석학과 행동-인지주의 정신치료 경향 사이의 학술적 쟁점 및 토론을 저해하는 형국이다. "정신치료가 전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되어버렸으며, 순전히 '의학적'으로 되돌아가며 행동주의에 복속되고 있는 중"이라는 엘리자베스 루디네스코의 지적과 "행동-인지주의 정신치료는 관찰 가능한 행동만을 중시하는 학습과 조절의 기술이지 정신 치료가 아니다"라는 자크-알랭 밀레르의 지적은, ‘정신분석학 흑서’의 저자들이 보기엔 행동-인지주의 경향에 대한 선험적인 비판일 뿐, 책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빠져있다.

다시 한번 불가능한 대화로 치닫고 있는 현 논쟁은 사실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 의해 '숨'에 비유됐던, 정신(psuche)의 위치를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문제였다.

사람들마다 그것을 가슴이나 심장에, 때로는 머리에, 때로는 온 몸을 휘젓고 다니는 것으로 간주하고자 했으나, 정신 자체는 언제나 비록 인간 '안에' 존속하기는 하나, '비가시적이고', '지정 불가능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원리'이자, 신체를 통해 '징후'로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은 분석대상 자체, 즉 '정신'을 지정할 수 없다는 문제에 봉착한다. 과학을 비단 칼 포퍼처럼 반증가능성을 통해 정의하지 않고, 그 단어의 원래적인 의미에서 주관적인 견해나 생각을 배제한 인식이라고 정의하더라도, 정신분석학을 '과학'의 범위에 넣을 수는 없게 되는 셈이다.

또한 정신을 '분석'한다고 할 때, 분할은 언제나 무한히 가능하며, 징후 역시 잠재적으로 무한하다는 측면에서 그 분석은 '종결될 수 없는' 것이자 그 치료는 '끝날 수 없다'는 아포리가 존재한다. 정신분석의는 인간의 마음을 치료함에 있어서 시시포스가 되기를 자처하지만, 극도의 우울증이나 정신질환, 각종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들은 한시라도 빨리 그 증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여기에 치료 과정이라는 시간을 감내하기 위한 심적 고통 및 치료비 부담이라는 경제적 고통이 덧붙여지는 것이다.

반면, 정신치료는 정신에 대한 iatros적(의사 혹은 의학적) 접근을 주장한다. 정신분석이 과정의 측면에 초점이 맞춰진다면, 정신치료는 무엇보다 치료 및 결과가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정신치료는 해석자의 입장에 서지 않고 조건을 부여해 유리한 결과를 유도해내는 한에서, 근대적인 의미에서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도 '정신'의 아포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인지심리학에서 하는 것처럼 두뇌(가정된 정신의 위치)에 대한 생물, 생리학적 연구 혹은 정보처리 메커니즘 추적을 통해 모든 것이 밝혀질 수는 없다.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한계에 위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분석학 흑서’ 혹은 미국에서 주류적인 행동주의-인지주의 정신치료가 은밀히 제기하는 '빠른' 치료와 '저렴함'이라는 경제적 논리가 정신분석학이라는 다른 접근 방식의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해야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의 민주주의를 깨트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아버지의 이름'에 기대온 정신분석학은 미셸 또르가 지적하듯 아버지의 지위의 쇠락 및 새로운 父性 관계의 조직화에 대해 답해야 하며, 디디에 에리봉이 지적하듯 동성애를 비롯한 사랑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가져야 할 것이다. 결국, 정신분석이냐 정신치료냐라는 이접적인 질문은 정신분석과 치료라는 연접적인 실천으로 바뀌어야 한다.

양창렬 / 프랑스 통신원·파리 8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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