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04:45 (월)
반론: 임헌규 교수의 비판에 답한다
반론: 임헌규 교수의 비판에 답한다
  • 백민정 경원대
  • 승인 2005.10.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철학, 현실적 효과 외면할 수 없다

 

1.
유학의 옹호자들은 흔히 유학의 원래 정신은 그렇지 않았지만, 수천 년 간 유학의 정신을 왜곡한 교조적이고 권위적인 유학의 역사(사회구성체 혹은 제도)가 있었다고 말한다. 가령 기독교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벌어진 온갖 잔혹하고 폭력적인 역사가 있었지만, 그것은 초기 기독교의 근본정신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경우다. 그러나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는 구체적인 역사와 사건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듯이, 맹자의 진정한 의도 혹은 유학의 근본정신에 대한 해명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유학의 이름으로 역사에서 이루어진 온갖 행위와 사건을 배제한 채 유학의 보편적 정신을 비호한다는 것,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유아론적이고 관념적인 정당화의 일종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임교수는 ‘맹자의 진정한 의도를 무시한 채 맹자 이후의 제도화된 유교사회의 구성체 혹은 이념을 가지고 맹자를 비판하는 우를 범한 것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런 평가에도 역시 진정한 유자로서의 맹자의 숭고한 의도와 그것을 왜곡시킨 그 이후의 유학적 제도 사이의 이분법이 설정돼 있다. 그러나 맹자의 진정한 의도는 결국 맹자의 언설과 주장을 통해 파생된 현실을 벗어나서는 유의미하게 논의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물론 유학의 교조화와 권위화에 맹자 혼자만 기여한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필자가 과도하게 유학적 문제를 맹자 자신에게만 짐지우고 있는 점은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유학자들이 계승하고자 한 유학의 진정한 대변자는 역시 맹자가 아니었던가!

2.
필자의 맹자 비판은 그의 철학 내적인 구조에 대한 해명을 기반으로 해서 수행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맹자의 언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부분, 그리고 이에 입각해서 수행된 맹자 논리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가령 ‘맹자가 인성을 우리 마음의 내재적인 본성으로 보았는데 왜 필자는 맹자의 인의예지를 외재적인 강제적 규범으로 간주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오히려 논점을 벗어난 것이라고 보여진다. 필자는 맹자가 본성을 선천적으로 내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을 부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필자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그의 내재적이며 선천적인 본성이란 것도 특정한 사회적 현실에서 발생한다는 점이었다. 굳이 한 개인에게 선천적인 것이 있다고 인정한다면, 그것은 가족제도와 국가제도 등과 같은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현실적 집단과 조직일 뿐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가족과 국가로부터 경험적으로 전수받은 것을, 인간 개인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되는 경향이 있다. 바로 이런 도덕적 의식의 경험적 발생과정에 대한 숙고를 통해, 필자는 내재적 본성에 대한 맹자의 순박한 믿음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생취의’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의 입장에서 수행된 것이다. 필자는 맹자 본인이 분명 숭고한 이상과 의리를 통해 호연지기를 기른 인물이라는 것을 부정한 적은 없다. 아마 그는 자신이 만약 의리를 위해, 천리의 이름으로 죽고자 한다면 기꺼이 죽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것이 맹자에게는 분명 멋진 인생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이 되물어보아야만 한다. 죽기 싫은 인간들까지 의리의 이름으로 죽게 만든 오랜 역사는, 도대체 누구의 어떤 담론들로부터 파생된 것인가? 바로 여기서 맹자의 이념이 단순히 개인의 신념에 그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맹자의 담론은 그리고 더 나아가 유학의 담론은 오랫동안 사회의 확고한 지도이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맹자의 본의에 관계없이 사생취의의 담론이, 그 이후 제도화된 폭력을 무수히 양산해온 점을 결코 간과할 수 없었고, 삶을 부정하는 허위의식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한편 맹자의 ‘윤리적 주체’ 문제에 있어서는 임교수가 지적한 것 이상 필자도 여러 차례, 생각하고(思) 구하고(求) 기를 줄 아는(養) ‘윤리적 주체’가 맹자에게 있음을 강조했다. 이 수양의 논의까지에는 분명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윤리적 주체가 성인(聖人)의 상태, 즉 가장 이상적인 마음 상태에 이른 그 지점부터를 필자는 비판했던 것이다. 언어적 표현의 고상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시적 성인의 상태에 대해 필자는, 리(理)를 실현하는 ‘기계적 매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했다. 전혀 다른 의도였지만, 송대 유자들도 사려가 없는 성인의 마음 상태를 자주 언급하지 않았던가? 물래이순응(物來而順應)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고민하고 결단하는 윤리적 주체가 아니라, 사태(外)와 관련 맺은 성인(內)이 서로 짝이 되어 실현하고 있는 ‘리(理)’ 자체일 뿐이다. 바로 이 리(理)의 실현을 통한 무한의 체험이라는 테마 속에는, 고민하고 결단하는 윤리적 주체가 사라지고 대신 천리 혹은 인성의 실현이라는 거대한 영원성의 지평만이 출현할 뿐이다.

필자는 윤리란, 그리고 자유와 책임의 문제란 오직 유한한 인격체의 의식 상태에서만 유의미한 담론임을 전제하고 있다. 임교수는 이 문맥에서 충서의 논리를 통해 유학이 타자관계에 주목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물론 유학의 의도는 훌륭했다. 그러나 유학의 타자관계는 결국 현상적인 내 마음과 내 마음의 영원하다고 전제된 본성 사이의 관계로 전환되고 만다. 이런 내재적인 수양의 위험성, 타인의 즐거움과 고통을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평가내리는 위험성을 지적하기 위해, 필자는 마음의 내적 본성을 실현한다고 하는 이상을 비판한 것이다. 또 그 본성을 실현했을 때는, 그나마 존재하던 타인에 대한 배려, 윤리적 주체의 망설임과 주저함 역시 동시에 사라지고 만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자타간의 경계마저 사라진다고 일컬어지는 성인의 경지에는, 오히려 타자의 고유한 자리마저 자신의 내면적 공간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위험만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4.
맹자의 철학이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조화와 질서를 도모한 군자의 학문이라고 임교수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오늘날 유학은 자본주의의 살벌함을 개인적인 내면의 침잠을 통해 인내하게끔 만드는 다양한 상품 가운데 하나, 혹은 유행하는 정신수양법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진정 위험한 것은 바로 이 내면적 자기 침잠과 위안의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권력과 경제구조에 무감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학은 내면의 정신수양을 강조함으로써 표면적으론 자본주의 논리를 배격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자본주의적 경쟁과 분업, 차별적인 사회적 역할 분담을 모두 긍정하는 데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맹자의 정치철학적 견해는 새로운 인간공동체를 창조하고 구성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가 될 가능성이 더 많다고 하겠다. 물론 맹자가 당시의 잘못된 통치 행위를 비판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지배행위나 통치행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필자는 맹자가 자명하다고 여겼던 이런 전제들을 문제삼고 싶었다. 필자는 그것이 철학자의 소임이라고 믿고 있다. 철학은 주어진 현실이나 전제들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음미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던져주어야만 한다. 스스로를 영원한 불가침의 지혜로 자임함으로써 역사와 현실 속에서 그 정당성과 보편성을 검증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철학의 탈을 쓴 종교일 뿐이다. 역사, 현실 그리고 비판으로 면죄 받으려고만 한다면, 도대체 철학이란 무엇이며 철학사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필자는 연세대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수료했다. 논문으로 ‘주희역학의 상수와 의리에 대한 연구’ 등이 있고, ‘스승 이통과의 만남과 대화’ 등의 저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