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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표상하기와 개입하기』 이언 해킹 지음| 이상원 옮김| 한울 刊| 466쪽| 2005
서평_『표상하기와 개입하기』 이언 해킹 지음| 이상원 옮김| 한울 刊| 466쪽| 2005
  • 고인석 인하대
  • 승인 2005.10.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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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과학 히트작…어려운 번역 아쉬워

필자는 해킹이라는 인물에 정통하진 못하지만 식견 있는 이들이 그를 주저없이 “천재”라 부른 것을 본적이 있다. 흥미로운 제목 때문에 손에 넣었던 그의 책 Historical Ontology(2002)를 보면서 필자 역시 그런 평가에 공감할 수 있었다. 통상적인 의미의 학자적 전문성에 덧얹어 그가 갖추고 있는 몇가지 덕목이 그런 평가를 부추기지 않나싶다. 사상사 그리고 과학기술의 역사에 대한―대개는 역사가에게나 어울리는―현미경 시야 수준의 정밀한 지식. 적절한 수준의―너무 높을 경우 보통 사람의 독서를 오히려 불편하게 만드는―인문적 필치. 그리고 그는 이른바 영미 스타일의 명료성과 더불어 독일이나 프랑스의 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심오하고 독창적인 사색을 겸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해킹의 이 책은 20년도 더 된 책이지만 이제야 우리말로 번역된 게 일말의 만시지탄과도 결부되지 않을 만큼 여전히 신선하고 알차다. 한 저술의 ‘신선함’과 ‘알참’이 흔히 상충하는 두 덕목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훌륭한 예외다. 과학철학이라는 영역에 발을 들인 입문자에게 필자가 권하는 책 가운데 뉴튼-스미스의 ‘과학의 합리성’이 있는데, 해킹의 이 책은 그것만큼 알차면서도 좀 더 신선했다. (대신 앞의 것만큼 차분하고 정연하지는 않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논의를 바닥까지 들여다보고 싶은 이는 저자가 문맥 속에 휙휙 던져둔 과거와 현재의 과학―그리고 이따금 철학―이야기에 따로 한참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신선함은 이 책이 특히 ‘과학적 실재론’과 ‘실험’이라는 두 주제를 저자 특유의 새로운 입장으로부터 설득력 있게 다루고 있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그가 ‘막간’―혹은 ‘쉬어가기’―이라고 이름붙인 장을 사이에 둔 두 부분 ‘표상하기’와 ‘개입하기’로 구성돼있다. (더 흥미로운 부분은 아무래도 ‘개입’을 다룬 후반부인 듯싶다.) “실재… 이 얼마나 엄청난 개념인가!”라는 말로 시작된 이 책 전체에서 저자는 과학적 실재론의 문제를 다룬다. 자연과학은 어떤 방식으로 실재와 관계 맺는가. 電子처럼 우리가 직접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과학적 대상들은 어떤 의미에서, 혹은 어떤 조건 하에서 실재가 되는가. 과학 활동을 사변, 연산, 실험하기의 세 국면으로 구분한 해킹은 특히 마지막 요소인 실험에 관한 분석에 힘을 기울인다. 실험은 우리가 가설의 맞고 틀림을 확인하기 위해 자연의 일부분을 멀거니 들여다보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현상을 창조하고, 산출하고, 정제하며, 안정화하는” 인간의 적극적 개입행위다. 전자든 유전자든 그것이 우리의 개입이라는 맥락 속에서 조작의 대상이 된다면, 그런 한에서 그것은 실재한다. “(전자든 무엇이든) 만일 그것을 뿜어 흩뿌릴 수 있다면 그것은 실재한다!”

이제 과학적 실재론은 이론적 논구의 맥락에서가 아닌 개입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공학의 맥락 속에서 정당화의 기반을 얻는다. 교과서에 실린 과학이론보다 과학자의 (개입) 행위와 그것을 가능케하는 도구 그리고 공학의 차원에 우선적 관심을 쏟는 해킹의 작업들은 역자도 말하듯 최근의 과학학 연구에서 실험과 도구에 대한 관심을 체계적으로 고조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짧은 서평에서 다 거론할 수는 없지만, 해킹은 이 책에서 참신한 화두 여럿을 던지고 묵은 주제에 대해서도 신선한 해석의 시각을 제안한다. ‘추론의 스타일’, ‘현상의 창조’, 물리학에서 ‘효과’의 개념 등이 그런 예이고, 관찰의 이론적재성에 대한 논의가 또한 그렇다. 필자는 이 책에서 특히 현미경에 관한 논의(11장)를 백미로 꼽고 싶다. 여기서 저자는 흥미진진한 서술을 통해 현미경이 소극적인 의미의 ‘들여다보기’를 매개하는 도구가 아니라 탐구자의 적극적인 개입이 구현되는 장소라는 사실을 성공적으로 부각시킨다.

역자에 따르면 이 책은 20세기의 히트작인 ‘과학혁명의 구조’의 판매부수를 추격하고 있다 한다. 내용을 보든, 또 논리경험주의와 포퍼-쿤-라카토슈-파이어아벤트 4인방의 시대 이후 과학철학의 새로운 흐름을 특징짓는 대표적 인물로서든 그건 개연성 있는 얘기다. 그러나 무엇보다 번역이 아쉽다. 물론 ‘읽기 쉬운’ 번역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독자더러 “이 사람 원래 어려운 사람이요. 용기 있는 독자는 따라 오시요!”라고 말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더구나 이 책은 어구 하나하나를 연구하며 읽어야 할 고전이라기보다는 문제를 파악하고 지식을 습득할 양서의 범주에 든다. 이 경우 역자가 할 일은 독자가 원문을 궁금해 하지 않을 번역을 제공하는 것이다. 필자는 가령 2장의 “세우기와 일으키기”라는 고심 깃든 번역어처럼 몇몇 불편한 번역어가 있었다. 만들어 두고서 내놓지 않은 채 묵히고 뜸을 들이는 일이 종종 쓸모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고인석 / 이화여대·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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