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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 비관주의 자제해야...헌정개혁만이 길인가
이상적 비관주의 자제해야...헌정개혁만이 길인가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09.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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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쟁점: 강정인 교수, 진보학계의 이상주의.식민주의 비판

‘창작과비평’에 의해 ‘87년체제’로 규정된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는 지식인 담론 속에서 그 태생적 불구성이 유난히 강조되어 왔다. 그것은 87년체제가 정치제도적 민주화에만 국한된 성취였으며, 사회경제적 평등의식의 고취나 분배정의의 확대에는 미흡했다는 판단에 기초한다. 이 판단은 다시 개혁세력이 수구세력을 등에 업었기 때문이라는 이분법적 진단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87년체제에 대한 이런 판단을 포함해 한국 민주주의 진행과정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관적 담론이 지나치다는 비판이 최근 제기됐다. 지난 9일 서강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강정인 서강대 교수(정치학)는 ‘서구민주화 경험에 비춰 본 한국의 민주화’라는 발제문에서 한국은 지난 50년 동안 꽤 훌륭한 한국적 민주주의 모델을 갖춰왔다고 진단했다.

강 교수의 지적은 민주주의가 ‘끝이 안 보이는 터널’이라는 고전적 정의에 충실하다. 즉, 정권창출로 표상되는 민주화 기운의 주가상승이 다시 급하강 기세로 돌아서는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그 본질에 내재된 전형적인 운동작용이라는 것. 강 교수는 87년 이후 20년 간의 한국 민주주의가 서구의 ‘인과론적 변화’와는 달리 ‘목적론적 변화’의 모습을 보였으며, 한국 민주주의의 정착 또는 공고화 과정은 ‘민주주의와 신뢰’, 그리고 ‘발전주의의 변형적 지속’이라는 테마로 살펴볼 때 그 현실적 의미와 전망이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후발국 민주주의에는 사실 ‘계급분석론’이나 ‘시민문화론’이라는 이론이 잘 들어맞지 않는다고 강 교수는 말한다. 이는 어느 정도 보편화된 인식이다. 그러나 꽤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의 실제 한국사회 분석에서 이러한 이론과 현실의 불일치는 곧잘 한국 민주주의를 ‘예외’나 ‘일탈’적인 과정으로 인식하게 해왔다는 게 그의 비판이다. 가령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같은 경우 “87년 민주화가 봉합”에 불과했으며 과거청산이 이뤄지지 못함으로써 “봉합에서 봉합”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에 대해서는 박형준 동아대 교수(사회학)가 “지나친 이분법적 시각”이며, 좀더 거시적인 “국가능력”의 차원에서 한국사회를 살피지 못해 “87년체제의 일면밖에 보지 못한다”는 비판이 가해진 바 있다. 강정인 교수는 좀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데 가령 한 교수처럼 지식인들이 “서구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이상화”한다고 말이다. 이런 기대지평을 가지고 민주사회가 갖춰야 할 ‘선결조건’ 이론을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바깥에서 오는 어떤 것이라는 통념만 계속 재생산하면서 메시아의 도래가 연기되는 현실에 좌절한 “자기비하의 심리를 내면화”하게 된다고 강 교수의 글은 시사하고 있다. 또한 이런 ‘민주주의 이상화’ 경향은 내부적 사상투쟁을 통한 민주이념의 발전이 아니라 서구 모델로부터 “빌려온 정당성”을 바탕으로 민주주의가 수용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가해졌다.

또 하나의 중요한 발견이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신뢰’의 문제이다. 전세계적으로 정부나 국가에 대한 신뢰지수가 낮아지는 것은 공통적이다. 하지만 선발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신뢰의 저하가 “복지국가의 위기 및 개인주의의 만연에 의한 도덕적 규범의 붕괴”로 인해 발생한 것인데 비해, 한국은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획일화되어 있던 군부정권과 달리 민주화 과정에서 정부에 대한 신뢰를 새롭게 건설해야  하는 문제와 부딪힌 것”이라는 점에서 신뢰 저하의 원인이 다르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분석은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서구종속적인 이론가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지체가 일부 정책결정자들의 잘못에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비판적 지식인들에 대한 총체적 반론이라고 할 수 있다. 강 교수의 주장은 최근 ‘87년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논의에 새로운 초점으로 등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올 상반기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한 좌담에서 “87년체제가 나쁜 균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정치적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이뤄냈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상당한 장애를 겪었다”고 그간의 한국사회를 정리한 바 있다. 이는 “1987년 개헌이 절대왕조체제를 벗어난 과도기 정치세력들의 권력협정”이라는 홍윤기 동국대 교수(철학)의 주장과도 비슷하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적’ 정의가 현실적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여기서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와, 박명림, 홍윤기, 김종엽, 한홍구 등의 젊은 학자들 사이에서 갈라지는 지점이 관찰되고 있다.

소장학자들은 “87년 헌정체제의 극복”을 외친다. 그것은 지역구도로 분할된 87년체제의 근본적 한계가 헌정체제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것이다. “헌법의 주체를 정치권 중심에서 시민사회로, 주제를 권력구조 중심에서 헌정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으로 전환하자”는 박명림 연세대 교수의 주장이 그 방향을 포괄적으로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최장집 교수는 ‘헌정체제’의 문제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파악하지 않는다. 그는 최근 자신의 저서 개정판에서 한국 정치가 ‘정당중심’적 기능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이로써 민주주의가 확대될 수 있는 통로가 막혀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최 교수는 한국사회의 가장 큰 균열인 ‘노동문제’가 민주사회의 ‘常數’ 수준으로 존재하는 것을 넘어 지나치게 확대되어 있다는 비관적 해석을 지속적으로 내놓고 있는 중이다.

여기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를 조망하는 세가지 시각이 있다. 하나는 낙관적이고 둘은 비관적이다. 비관적 입장도 다시 그 해결책에서 다른 길을 보여준다. 지식인들이 머리를 모아야 할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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