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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구원의 도시, 빛과 어둠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고난과 구원의 도시, 빛과 어둠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 김재호
  • 승인 2021.11.2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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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상트페테르부르크』 W. 브루스 링컨 지음 | 허승철 옮김 | 삼인 | 532쪽

한 도시의 영혼에 대한 경이로운 전기, 그리고 그 너머의 이야기

자연을 거슬러 늪지를 메워 건설된 도시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의 러시아가 지향한 것을 화려하게 반영한 도시 
세상을 바꾼 혁명의 요람이 된 도시 
푸시킨, 고골, 도스토옙스키, 차이콥스키, 쇼스타코비치의 위대한 예술을 만든 도시 

 
1703년 러시아의 전설적인 표트르 대제(표트르 1세)가 ‘상크트 피에테르 부르흐’라고 명명한 곳은 원래 궂은 날씨에 수질도 좋지 않고 지형적으로도 바닷물이 자주 범람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표트르는 러시아가 네덜란드같이 해양을 향해 나아가는 나라가 되길 바라고 이곳을 ‘유럽으로 나가는 항로’, ‘유럽으로 난 창’으로 삼아 1712년 공식 수도로 천명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고난과 구원의 도시, 빛과 어둠의 도시(원제: Sunlight at Midnight: St. Petersburg and the Rise of Modern Russia)』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러시아 역사 전문가인 윌리엄 브루스 링컨(William Bruce Lincoln, 1938~2000)의 유작이자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저작으로, 얼마 전 정도 3백 주년을 맞은 이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다루었다. 표트르 2세가 잠시 모스크바로 천도한 몇 년을 제외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20세기 초 볼셰비키가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다시 모스크바로 수도를 옮겨 갈 때까지 줄곧 수도로서, 유럽으로 난 창의 역할을 해오며 러시아의 고난과 구원, 빛과 어둠의 역사가 펼쳐지는 무대가 되었다. 

시인 푸시킨은, 표트르 대제가 어떻게 네바강 늪지대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는지 묘사하며 “그의 결정은 운명이었다”라고 썼다. 천도 당시 수많은 반대에 부딪힐 정도로, ‘성스러운 러시아의 수도이자 경건한 중세적 도시 모스크바는 15세기와 마찬가지로 17세기가 될 때까지 수도로서 부족한 면이 없었다.’ 적에게서 빼앗은 지역이자 왕국의 가장 끝인 북극권 근접 지역, 지형적 이유로 홍수와 화재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이 지역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다는 표트르의 계획은 ‘수백 년 동안 러시아의 운명을 형성해온 모든 편견, 믿음, 희망에 도전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 군주 또는 집단 정신

1차 대전 발발 직후 슬라브어와 더 가깝고 독일어와 더 먼 ‘페트로그라드’로 이름을 바꾸고, 1924년엔 바로 이 도시에서 일어난 혁명의 주역의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던 이 도시는, 소련 체제에 대한 도전이 거세지면서 1991년 주민투표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당시 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을 지지하던 이들은 이 복원이 ‘계몽·문화·개방성·자유·세계주의·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이고,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은 세계로부터의 고립, 전제 정치의 계속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명칭 변경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이 ‘혁명을 통해 얻어졌고, 레닌그라드 봉쇄라는 영웅적인 투쟁을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후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미국인으로서 노벨상을 수상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시인 조지프 브로드스키는 당시 ‘주민들이 악마의 이름보다는 성자의 이름이 붙은 도시에 사는 것이 낫다’고 촌평했다. 한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은 시대 예술을 이끌어갔고, 소련 정권으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정권이 남편과 아들의 생명까지 가져갔던 시인 아흐마토바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그토록 사랑하고 그리워했음에도, 9백 일의 참혹하고도 기념비적인 봉쇄 기간을 말할 때는 ‘레닌그라드’라는 이름만을 사용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기. 이미지=위키피디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저자 링컨 특유의 탁월한 서술 기법과 통찰력 있는 문장은 이 대작을 한 도시의 전기(傳記)이자 도시 연대기의 백미로 만들었으며, 픽션 문학만큼 흥미진진하고 긴박감 가득한, 감동과 드라마가 살아 숨 쉬는 스토리텔링으로 엮었다. 또한 표트르 대제가 유럽을 지향점으로 삼고 이곳을 수도로 만드는 데 사람들을 어떻게 강제하였는지, 유럽의 당시 건축가들이 이 신생 수도로 들어와 어떻게 자신의 포부를 펼칠 기회를 잡았는지, 건축에 중독되다시피 한 여제들이 이 도시에 어떤 화려함을 창조해냈는지, 그리고 유럽에서 들어온 계몽주의가 귀족들의 토론 주제이기를 넘어 현실을 바라보는 한 시각으로 퍼져가면서 러시아의 황제들이 이 사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했는지, 또한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박물관 중 하나인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컬렉션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전쟁과 혁명 기간에 어떤 운명을 겪게 되었는지, 어떻게 차르들이 고대 로마와 자신의 국가를 동일시하려 했는지, 산업혁명의 물결과 고질적인 빈부 격차,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의식주 조건, 화재와 홍수라는 만성적 재난 한가운데서 이 도시의 시민들이 어떻게 삶을 헤쳐나갔는지, 노동자 파업 시위가 어떻게 대륙으로 퍼져갔으며 공산주의의 정신이 어떻게 태동했는지, 수많은 예술가들이 어떻게 이 도시를 사랑하고 증오했는지, 또 헤아릴 수 없는 대작들을 탄생시키는 배경이 된 이 도시와 그들의 조국을 어째서 등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2차 대전 9백 일간의 ‘레닌그라드 봉쇄’에서 이 도시의 시민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또한 볼셰비키의 테러(공포정치) 속에서 어떻게 삶을 이어갔는지, 어떻게 영광을 되찾았는지

이 책은 이 모든 것들을 풍부한 자료와 충실한 고증을 바탕으로 서술한 도시 연대기의 진정한 백미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링컨의 사망으로 다루어지지 못한 1991년 이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해서는 역자인 허승철 교수가 그 이야기를 잇고 있어 현대의 러시아를 이해하는 데까지 부족함이 없다.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관광객들이 에르미타주의 놀라운 보물을 보기 위해, 세상을 뒤흔들었던 혁명의 과거를 접하기 위해, 도스토옙스키가 살던 집을 방문하기 위해 이 도시를 찾는다. 마찬가지로, 3백여 년 전 서방으로 낸 창이 된 이래 이 도시는, 열다섯 개 시간대에 걸쳐 있으면서 지구 표면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강력한 근대 제국의 신경중추로서, 자신의 삶이 지금보다 나아지기를 바라던 수많은 이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읽는 것은, 이 도시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이 도시의 현재를 바로 보기 위한 조건이며, 러시아의 역사와 현재를 이해하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할 뿐 아니라, 먼 곳에 있는 한 도시의 흥망성쇠를 들여다보는 것이 우리가 사는 도시의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도 이해하고 내다보게 한다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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