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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함석헌 64: "히말라야 높은 봉 그윽한 골 피는 이상한 꽃같이"
내가 본 함석헌 64: "히말라야 높은 봉 그윽한 골 피는 이상한 꽃같이"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5.08.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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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나는 옛날의 모험가와 한가지 노래하련다
나가는 역사의 수리채를 메고 달려나 보련다.
내 아직 얻었담도 아니요
흐린 거울 속 보듯 내 눈에 희미는 하나
앞엣것 잡으려 뒤엣것 잊고 나는 닫노라
이제부터 나를 붙잡지 말라

내 즐겨 낡은 종교의 이단자가 되리라
가장 튼튼한 것을 버리면서 약하면서
가장 가까운 자를 실망케 하면서 어리석으면서
가장 사랑하는 자의 원수가 되면서 슬퍼하면서

나는 산에 오르리라
거기는 꽃이 피는 곳
히말라야 높은 봉 그윽한 골 피는 이상한 꽃같이
그 향 냄새맡는 코를 미치고 기절케 하는 꽃
그 꽃을 맡기 전 나는 벌써 취했노라>

선생님의 유명한 <대선언>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무교회주의에 고별을 선언하는 그의 외침이다. 항상 낡은 껍질을 벗어 버리고 새롭게 부활하는 생명의 힘을 우리는 이 시에서도 읽을 수 있다.

<평생을 눈과 비바람에 스치고 바래서 진(盡)하였지만 그래도 고개를 흔들어 쓰다 달다 말하지 않는 <古木>의 의연함에서 항상 <글세>만 되풀이 하시던 선생님의 참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언젠가 이 漢詩를 강의하시면서 <盡>이라는 자를 현재완료진행형이라고 말씀하시던 일이 기억에 새롭습니다. 선생님께서 때를 따라 암송하시던 롱펠로우의 <삶의 찬가>(A Psalm of Life)의 마지막 절 <여전히 이루면서 여전히 쫒으면서>(Still achieving, Still pursuing)라는 표현과도 서로 상통되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려다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노릇 못하고 나가선 국민노릇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이것은 시 아닌 시다.>

선생님의 <수평선 너머>라는 시집의 서문에서 쓰신 선생님의 자화상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즐겨 암송하시던 두보(杜甫)의 고백행(古柏行)이라는 시의 마지막 절을 연상하곤 합니다.

志士幽人莫怨嗟
古來大材難爲用

지사여 유인이여 원망하거나 또는 한탄하지 말라, 옛부터 대재는 쓸 곳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란다 하고 읊은 두보의 그 절구가 바로 선생님의 모습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씨알 여러분

2월 4일은 선생님의 2주기 날입니다. 선생님이 남기고 가신 이 씨알의 소리를 맡아서 복간한지도 이제 두 해가 넘었습니다. <씨알의 소리>지를 내면서 선생님의 크신 인격의 이모저모가 더욱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을 갖는 때가 많았습니다. 정말로 선생님의 신들매를 풀기에도 부족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올해는 어쩌다가 선생님의 2주기를 기념하는 조촐한 행사조차도 없이 지나가게 되나봅니다. 씨알 여러분께서는 선생님의 기일을 생각하시면서 선생님의 뜻을 기리시기를 빌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말년에 그렇게 비판하시던 국가주의가 지금 걸프전쟁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써나가고 있습니다. 인류역사의 또 하나의 추한 몰골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의 이 시대를 지켜보면서 선생님의 평화사상을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안녕하시기 바랍니다.>

위에 인용한 글은 내가 <씨알의 소리>지의 발행을 계속할 것인지 또는 중단할 것인지를 잠을 못 이루면서 고민하고 있을 때 쓴 1991년 2월호 <씨알의 소리>지의 <발행인의 소리>의 마지막 부분이다.

<씨알의 소리>지 1990년 4월호 <씨알의 소리 소식>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정기독자 2천명 돌파!>라는 제목 하에 <본지는 90년 신년호부터 서점상대로 하는 판매경쟁은 포기하기로 하고 오직 정기독자 위주로 확장해 나갈 방침을 세운 바 있다. 3월 26일 현재 씨알의 정기 독자는 2천명을 돌파해서 나가고 있다(2157명). 연내로 3천명을 목표로 삼고 있고 정기독자 4천이 될 때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많은 분들의 정성어린 후원에 힘입어 그런 대로 조금씩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를 빌어 편집소위원회를 끝까지 열심히 이끌어 나가주신 김경재 교수와 김영호 교수께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편집소위원의 한 분이셨던 당시의 한승헌 변호사님은 도중에 그만 두셨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사태는 생각지도 않은 묘한 곳에서 꼬여가고 있었다. 당시 내 셋째 아이가 캐나다에서 언어학에서 학위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는데 오래간만에 일시 귀국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그 뒷바라지를 넉넉하게 해주지 못해 적은 장학금을 타서 어렵게 공부하고 있었던 때였다.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출국하는 날 김포공항에서 그를 전송하러 나온  초등학교 때부터 집을 드나들던 그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송상열이라는 친구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터라 반갑게 잠시 이야기가 오고가고 했는데 내가 <씨알의 소리>지를 발행하느라 몹시 고생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화제에 올랐다. 이런 일이 계기가 되어 그 후 송상열 군을 몇 번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의 동료인 박영률이라는 젊은이와 함께 <정보성>이라는 작은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보성에서는 <부동산 뱅크>와 <익스프레스>라는 부동산에 관한 정보지를 매달 발행하고 시판하고 있었다. 신진 기업체로서 제법 기반을 단단하게 닦아 나가고 있었다.

결국 이 두 젊은이가 <씨알의 소리>지의 현 상황을 자기들 나름대로, 말하자면 요새 말로 기업진단을 하더니 다른 것은 도와 줄 길이 없지만 원고만 제 때에 넘겨주기만 하면 자기들의 제작 시스템에 넣어서 돌리면 현재 <씨알의 소리>지의 인쇄 및 발행에 소요되는 비용을 백만원 정도는 절약할 수 있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물론 자기들은 <씨알의 소리>지 제작에서는 실비로 도와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자기들도 대학에 다닐 때 <씨알의 소리>지에서 영향을 받은 세대들이기 때문에 기꺼이 도와 보겠다는 이야기였다. 당시의 사정으로 매월 백만원 정도의 비용을 절감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도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운영위원회 및 편집회의 등을 거쳐 이와 같은 사정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얻어서 <씨의 소리>지 인쇄 및 발행 업무를 1990년 7월호부터 정보성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1991년 정월 초이튿날에 안병무 계훈제 및 김동길 세 분의 명의로 인쇄소를 옮긴 것을 문제삼아 잡지내용의 편집에도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고 잘못하다가는 상업주의와 결탁될 우려가 있으니 그 잡지사와의 제휴를 반대한다는 내용의 의견서가 우송되어 왔다.

<씨알의 소리>지의 발행인으로서 참 답답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조처를 승인해준 편집회의에 불참했던 이 세 분에게 경위를 상세히 적어서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여기서 나는 지난 3년간 써온 <내가 본 함석헌>을 끝맺게 되는 것을 슬프게 생각한다. 그러나 더 이상 집필을 계속하다가 자칫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을 포함해서 몇몇 친구들을 폄훼하는 우를 범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발행인으로 발행한 마지막 호 <씨알의 소리>지 1991년 3월호에 실은 <발행인의 편지: 기다려라>라는 글 전문을 다음 번에 전재함으로써 이 연재의 대미를 맺고자 한다.

감히 선생님의 글을 원용하는 불초를 무릅쓰면서 나의 평생을 회고해 보아도 그야말로 무엇하나 이루어 본 것이 하나도 없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생을 살아 왔구나 하는 자괴심이 앞선다. 전공에 충실한 대학교수도 못되면서 대학에서 자리만 더럽혔고 그렇다고 학자 아닌 삶에서도 모두가 실패로 끝나버린 평생을 살아온 것이 민망하기만 하다. <씨알의 소리>지도 결국은 맡은 지 3년도 못 채우고 휴간을 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실패담이 되고 만 셈이다.

그 동안 이 연재를 읽어주시고 격려해 주신 여러분과 특히 교수신문사를 운영하고 계신 이영수 교수님께 너무나도 귀한 기회를 주신 데 대하여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송상열 사장과 박영률 사장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히말라야 높은 봉 그윽한 골 피는 이상한 꽃의 향기에 취해 계신 선생님의 영 앞에 나는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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