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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국정치 통사...비판적 해석 지나쳐
본격 한국정치 통사...비판적 해석 지나쳐
  • 이재석 인천대
  • 승인 2005.08.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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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刊書評_『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 진덕규 지음| 지식산업사 刊| 2002| 638쪽

정치사에 바탕을 두지 아니한 정치이론의 적실성을 운위하면서도, 정치학이란 학문 안팎의 상황적 요인으로, 정치학에서 한국정치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다. 다행히 최근에 정치학자 중 한국정치사를 전공으로 하는 학자 수가 늘고 있고, 연구성과도 많이 나오고 있으나, 정치사의 중요성에 비해 다른 분야보다 미흡한 실정이다. 특히 한국정치사의 통사적 연구는 희귀하다고 할 정도다.

이런 차에 나온 진덕규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은 오랫동안 한국정치사연구에 천착해 온 원로정치학자의 노작이라 할 수 있다. 정치학과 역사학 전공자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정치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 모두에게 한국정치사를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기여하리라 본다. 그 이유는 이전에 출간된 ‘한국현대정치사서설’에 이어 일관된 체계 아래 전통시대 한국정치 전체를 분석한 본격적인 한국정치사 통사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책이 역사정치학적 접근방법에 따라 새로운 인식의 틀을 만들어, 일차자료에 충실하면서 역사학계 등의 기존의 연구성과를 두루 섭렵해 한국정치사를 새롭게 해석한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거 정치의 역사적 전개과정에 인식의 초점을 둔 서술방식의 정치사 연구한계를 지적하면서, 역사정치학을 통해 과거의 정치를 현실과 연계된 살아있는 정치로 현재화 할 수 있다고 보고, 한국적 특수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한국정치사를 보편적 논리체계로 해석하고 있다. 저자는 이데올로기, 지배세력, 통치기구, 강대국의 영향력이란 네 가지 요소의 연관관계의 표현을 정치라 보고, 전통시대 한국정치를 지배세력과 지배이데올로기의 연관성을 조합해 통치체제의 유형화를 모색한 다음, 그 유형에 따라 한국사를 시대구분하고, 각 시대별 특성을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전통한국의 국가발전단계에서 통치제체를 네 가지로 유형화 한다. 핵심통치자인 제사장이 무속을 지배이데올로기로 활용한 제정일치단계의 제의-군장체제, 군사지도자가 통치세력의 핵심이 되어 불교를 지배이데올로기로 활용한 고대적 군장체제, 군사지도세력의 세속적 영향력이 잔존한 가운데 문신관인세력이 지배이데올로기로 불교를 활용한 전제적 왕조체제, 문신-관인이 성리학을 지배이데올로기로 활용한 중앙집권적 전제적 왕조체제다. 이런 유형에 따르면 전근대 한국정치사는 제의-군장체제 유형의 고대이전의 초기국가와 고대국가, 고대적 군왕체제 유형의 통일신라이전의 국가, 전제적 왕조체제 유형의 통일신라에서 고려말까지의 국가, 중앙집권적 전제적 왕조체제 유형의 조선왕조로 구분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적 범위는 전통한국의 초기 국가부터 조선왕조의 19세기말까지 이며, 전근대적인 전통적 국가체제를 통치구조와 피지배층의 대응양식-지배세력의 교체와 재편, 통치권의 행사, 피지배층의 정치적 반응-이 12장에 걸친 본론을 통해 분석되고 있고, 결론은 통치체제의 전반적 성격을 요약하고 있다.

이 책의 요점은 서양사회가 생산양식에 기반을 둔 지배세력의 등장과 교체가 이루어져 피지배층의 상승이 가능한 사회였음에 반해, 전근대한국사회는 정치결정론적 성격이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하층민이 상층민을 대치한 권력구조의 변동은 발생하지 않고 지배층 안에서의 통치세력으로 상승이나 수평적 권력이동만 있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전근대 정치사에서 정치변동은 왕조체제와 관계없이 피지배층은 통치권력에 접근이 배제된 채 지배세력만의 통치체제로 이어진 왕조체제였고, 이런 체제의 성립과 지속에는 대외관계와 통치이데올로기가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전근대적 정치전통은 가치있는 변화보다는 전제적 왕조체제의 성격과 내용을 온존하고자 하는 성격을 지속적으로 보여 주고 있고, 이 유산은 조선조 말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의 내용을 짧게 요약해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방대한 분량인데,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학문적으로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본다.

첫째 이 책은 역사정치학의 접근방법을 통해 정치학과 역사학 양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기여한다. 정치학의 경우 자칫 추상적 이론화에 머물고 몰역사적이기 쉬우며, 역사학의 경우 서술적 사실해석에 머물고 이론에 취약하기 쉬운데, 정치학에는 역사에 대한 주목을, 역사학에는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시해 주고 있다. 저자가 인용하는 풍부한 기존의 역사학계 등의 연구 성과와 일차 자료는 전자의 경우를, 저자가 창조적으로 설정한 한국정치사에 대한 역사정치학적 인식논리는 후자의 경우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징표이다.

둘째, 한국정치사연구의 깊이를 심화시켜주고 또한 한국정치사와 연구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다. 사실 기존의 정치사연구는 정치학계의 연구든 역사학계의 연구든 사건이나 정치변동 등 미시적 분석이 일반적이었음에 비해, 저자는 창조적으로 구성한 권력관계망을 토대로 전통 한국의 정치를 통시대적으로 권력구조의 변동을 분석해 일반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점은 한국정치사연구에 최초로 시도된 학문적 노력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고대이전 사회의 제의-군장통치체제 유형을 설정하고 그 시대로부터 역사적 검토를 시작함으로써 한국정치사연구의 지평을 고대 이전 즉 상고대까지 확장하고 있는 점 또한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일반적으로 치중하기 쉬운 한국정치의 특수성 논리나 서구의 발전논리에서 벗어나, 한국에 특수성을 가진 한국사를 보편적 논리 아래 재평가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이 점은 분석체계의 구축에서부터 이 책의 필요한 부분마다 언급된 서양의 정치현상의 비교설명에 잘 나타나 있다.

셋째, 이렇게 함으로서 이 책은 신라, 고려, 조선의 왕조가 장기적으로 존속하고, 한국에서 서구와 달리 개인의 권리에 바탕을 둔 정치질서의 전개가 늦은 데 대한 훌륭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이 전근대적 국가통치체제를 다루는데 그쳐 시사로 그치고 있지만, 저자가 예고하고 있는 조선조 말에서 조선총독부 통치까지의 후속 연구서가 나오면, 독자들은 한국정치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얻으리라 본다.

이렇듯 학술적으로 한국정치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흥미롭고 재음미해 볼만한 가치가 매우 큰 전근대 한국정치사 ‘통사’이지만, 방대한 범위와 양 때문에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견해도 적잖게 있을 수도 있다. 특히 역사정치학적 접근법에 의거하는 건 한국정치사의 특수성과 세계사적인 보편성 가운데 어느 곳에 주안점을 두는가 하는 입장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사대관계와 조선왕조의 성격문제가 특히 그러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전근대 동아시아국제질서가 중국중심적 국제질서였고, 이 질서 속에서 사대는 보편적 외교의 한 형식이었다. 사대는 나라에 따라, 그리고 한국사에서도 왕조에 따라, 같은 왕조도 시대상황에 성격의 차이를 보인다. 한국의 경우도 국력의 강약의 차이로 말미암아 지정학적 위치상 대륙국가의 부침에 따라 자주와 굴종의 양상이 달랐다고 할 수 있는데, 저자의 치열한 학문적 비판정신과 민주와 자주에 대한 열정, 그리고 발전을 위한 이상적인 이념형의 수립의 발로로 이해하지만, 한국사의 사대를 너무 비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일례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도 외세의 힘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했듯이, 권력의 강화를 위해 외부의 힘에 의뢰하는 것은 전통한국에서만이 아니라 권력 또는 권력자가 떨쳐버리기 어려운 일반적 속성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제왕조’로 규정한 조선왕조의 성격 또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조선이 군주제인 점은 사실이었으나, 조선의 군주가 중국의 군주처럼 “전제적”이었는가, 그리고 제도상으로는 만인지주의 위치에 있으나, 실제로는 성리학의 규범과 진리의 해석자임을 자임하는 지식인과 관료 양반에 의해 규제를 받았으므로, 조선왕조는 왕의 이름으로 통치를 했어도 군약신강의 양반관료체제란 견해가 널리 수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한국정치사에 대한 깊은 이해는 정치학적 성찰과 한국정치의 발전에 일조한다는 믿음에서 전공은 아닐지라도 한국정치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일독하기를 바라면서, 저자의 후속작의 출간을 고대해 본다.

이재석 / 인천대 정치사상

필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척사위정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정치사상사’, ‘21세기한민족통합론’ 등의 저서가 있다.

●저자 진덕규 교수(1938~)는

진덕규 교수는 연세대에서 ‘한국 정치사회의 권력구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9년부터 이화여대에 첫발을 내딛었고 33년간 재직한 후, 2002년 12월에 마지막 수업을 했다. 지난 2000년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베스트 티처’로 선정됐던 그는 자신의 교직생활을 “오히려 학생들에게 배운 시간”이었다며 편지를 나눠주었다. 매학기 수업을 2개 이상 맡으면서도 저술작업도 놓지 않았다. ‘한국의 민족주의’, ‘현대민족주의의 이론구조’, ‘현대정치사회사회학이론’, ‘현대정치학’, ‘글로벌리제이션, 그리고 선택’, ‘한국 현대정치사 서설’ 등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정치사연구 시리즈’를 8권까지 완성할 작정이다. 현재는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한림과학원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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