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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특집: 象徵에 집착하는 사회
사회특집: 象徵에 집착하는 사회
  • 신정민 기자
  • 승인 2005.08.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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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독점에 저항하는 방식...'행위' 이전에 '談論'을

▲충의사 현판 철거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
오늘날 한국사회는 상징물 투쟁에 사로잡혀 있다. 죽은 자의 흔적이 살아있는 자에게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작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거론되어 온 광화문이나 충의사 등 박정희 前 대통령이 직접 썼던 현판 철거여부 논란과 함께, 최근에는 한 시민단체에 의해 제기된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문제가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기념비와 기념일, 그리고 현판과 동상은 ‘기념’을 넘어선 ‘상징’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김중섭 경상대 교수(사회학)는 “기념물은 시대(권력)를 반영하는 상징물이 많은데, 이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상징물을 통해 저항한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상징물을 문제 삼는 점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소수의 의견이 일반대중에게 가장 쉽고 빠른 파급효과를 거둘 수 있는 전략에 기인한다”라고 본다.

다시 말해 물리력과 경제, 정치권력이 부족한 소수세력들은 상징물을 건드리는 행위를 통해 효과적인 선전과 지지를 얻어낸다는 것이다.

채정민 고려대 교수(문화심리학)는 ‘문화를 구성하는 주된 요소로써 일반대중에게 가장 쉽게 보이는 것이 상징’이라는 비교심리학자 홉스테드의 이론을 예로 들며 “대결구도에서 특정한 상징물이 싸움거리가 되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이러한 행위는 상대의 중요한 정체성을 건드리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인터넷과 주요 언론의 여론몰이로 침소봉대격 효과를 노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미영 신라대 강사(사회심리학)는 “일정기간 형성되고 지속되어온 내면화된 상징을 바꾼다는 것은 객관 이전의 신념 문제이므로 단칼에 베듯 쉬운 문제가 아니다”라며 일부 시민단체의 운동효과에 대해 의문을 나타낸다.

내면화된 상징은 잘라도 잘리지 않는다

특정 상징물의 철거나 훼손된 과거의 사례는 주로 시대적 상황이 혼란스럽던 격변기에 흔히 일어난다. 광복 직후에는 분노한 국민들이 전국 1400여개의 일본 신사나 사당을 일거에 없앴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남한측에서 세운 추모비가 깨지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했다.

또한 4·19 시기 학생들은 이승만 동상을 내려앉혔고, 1990년대 들어서는 개인에 의해 전직 대통령의 동상과 조상의 묘비가 훼손되기도 했다. 이쯤되면 상징물의 건립과 존속, 철거 시기만으로도 역사를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이런 상징물 훼손은 특정 종교집단의 단군상 훼손이나, 종립학교의 성상 훼손 등 종교나 사적이익집단에서부터 국가적, 나아가 국제적으로도 이뤄진다.

그렇다면 근래 들어 왜 이런 문제제기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일까. 김동직 명지대 교수(사회문화심리)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해석에 대한 지형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이어 김 교수는 “정치지형도를 바꿀 정도의 핵심문제가 아니라도 자기세력의 이해관계로 인해 일반대중을 유혹하는 교묘한 상징조작이나 정서적 자극을 조장한다”라며 정치적 목적을 위한 상징물 세우기를 비판한다.

또한 유문무 인천대 교수(사회이론)는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우리 사회의 성향이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기존에 안고 있던 문제들이 증폭되었다”라며, “기념물이나 사진, 거리이름 등 실체에 대한 권력 투영의 아우라 뒤에 일어나는 파워게임”으로 진단한다.
 
민주화의 진전 결과일 수도

이와함께 민주화의 진전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정호기 전남대 교수(정치사회학)는 “사회·역사·한국근현대사에 관심자들은 왜곡시키거나 이데올로기에 희석되지 않게 진실과 진상을 밝혀내고, 이런 사실에 대해 영상 언론매체 등을 통해 설득력 있게 드러내고 호소한다”라고 주장한다. 이어 “과거 권위적 정권시절에는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억압도구로 활용하여 진상과 진실이 가려져 시민들의 항거가 힘들었지만, 최근에는 ‘국가’부정관이나 문화연구가 일상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윤승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은 “상징물이기 보다는 대중적 문화기념물에 가깝다”라며 문화의 원형이나 삶의 본질을 드러내기보다는, 다분히 대중적이고 교조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어 윤씨는 “문화를 고정적으로 보면 항상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최근 논란은 기존 문화에 대한 일종의 헤게모니 투쟁으로 봐야한다”라고 말한다. 

현 정권 이후 좌우대립 분명해진 결과

김찬호 한양대 교수(사회학)는 “인류 어느 시대나 상징은 있어왔지만 근래의 문제는 상징문제라기 보다는 현 정권 이후 좌우대립이 분명해지면서 집약되어 나타난 문제”라고 보는데, 그러면서도 “감정에 치우쳐 토론이 부재하고 이성과 지성이 실종한다”라고 염려한다.

다른 학자들도 김 교수의 염려와 비슷한 견해를 보인다. 선미라 전남대 강사(기호학)는 “문화재를 취조하듯 대하는 점이 문제다”라고 비판하며 “거친 주장과 행위 이전에 중간담론의 매개역할을 할 장치가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이성적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것.

즉 일부 시민단체가 추구하는 가치나 목표가 시민을 위한 행위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사회의 저변에 깔린 갈등을 체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화의 장, 혹은 문화적 역량이 아직 부족하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다.

다음 시대 사람들을 위한 배려 부족

일단 ‘없애고 보자’는 일부의 일방적 주장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현재의 관점에서 역사를 재단하여 다음시대의 역사고찰 근거를 영원히 거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상징파괴된 공간에 새로운 대안이 제시되고 있는 가운데, 민주화운동 등의 명예회복을 위한 기념사업의 추진활동이 기존의 국가가 만들었던 권위적 상징화 작업방식에 벗어나지 못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와 관련해 이창익 서울대 강사(종교현상학)는 “여론자체의 근거가 없음에도 네티즌의 여론을 취합하여 비판해 일거에 일소하려는 처리방식은 다분히 문제가 있다”라며 네티즌의 여론몰이에 대한 의심스런 시각을 보인다.

또한 오향미 서강대 사회과학대 연구원(정치사상)은 “상징은 흑백논리가 아닌 다양한 해석을 가지고 있는데, 공론에 부치지 않고 철거한다는 논리 자체가 박정희 방식과 다를 바 없다”라며 일부 시민세력에 대해 비판한다. 이어 오씨는 “이런 계기를 통해 제작 의도와 현대적 해석이 만나는 등의 발전적 논의가 있어야 한다”라고 역설한다.

논의의 초점이 상징물의 존폐여부에만 몰린다는 점에서 윤태진 연세대 교수(문화이론)도 비슷한 견해를 보인다. 윤 교수는 “상징물의 철거논의에 집착하다보니 과거 상징물이 만들어진 동기나 당대의 의미와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의 문화적 트렌드가 바뀐 사실 자체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다”라며 상징과 현실관계에 대한 고민이 부재한다고 비판한다.

기억과 상징의 내전 점점 커져가

무엇보다 이 문제는 상징물을 통해 ‘어떤 것을 기억하느냐’와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두 가지 정치기억의 담론양상으로 보인다. 김민환 서울대 박사과정(사회학)은 “한국전쟁 이후 국가가 독점적으로 행한 기억과 망각의 사고방식 속에서 1980년대 이후 기억과 상징의 내전이 점점 커져가는 상태다”라고 말한다.

그는 “국가가 망각 시키려 했던 것을 기억하는 자체가 저항의 시작”라며 박정희 현판과 맥아더 동상 논란이 기존의 국가가 지정한 담론에 저항하는, 다른 담론을 만들어 낸 것으로 평가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저마다 서로 다른 각자의 대한민국을 품고서 상징물 해석에 과열 대치양상을 보이고 있는 지금. 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소수의 다양한 의견이 분출된다는 점에서 긍정을, 이성이 배제된 채 거친 주장만 난무한다는 점에서 우려를 나타낸다.

또한 일부 언론을 통한 문제의 본질 외면과 재상징화에 대한 문제도 지적한다. 접합점이 보이지 않는 이 문제의 실마리는 결국 사라진 이성에 있지 않을까. 죽은 자의 견고한 영향력에서 자유롭기 위하여, 이 문제는 이제 학계의 몫으로 돌아온 것 같다.   
신정민 기자 jm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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