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3:50 (금)
요순시대를 밥상에 실현
요순시대를 밥상에 실현
  • 주영하 교수
  • 승인 2005.08.0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시대 음식담론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속학)

‘홍길동전’을 쓴 실패한 혁명가 허균은 41세가 되던 1610년, 과거시험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귀향을 간다. 그곳에서 그는 ‘도살장의 문을 바라보며 헛입만 질겅질겅 씹는다’는 뜻이 담긴 ‘屠門大嚼’이란 제목을 붙인 글을 쓴다.

비록 자신의 집은 가난했지만, 어릴 때는 경상감사를 지낸 선친 덕분에, 자란 후에는 호화로운 집의 사위가 되어, 그리고 피난살이와 벼슬살이로 인해 조선에서 나는 산물로 만든 온갖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것이 없었던 허균. 그는 2백종이 넘는 음식이름과 명산지, 그리고 그 맛까지도 이 글에 적어 두었다. 가령 한양의 장의문 바깥에는 야들야들한 두부를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만든 두부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이 좋다고 했다.

하지만 허균의 글은 조선시대 선비의 정신에서 보면 그다지 마땅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 역시 “본디 食色은 성품이고 더욱이 먹는 것은 몸과 생명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선현은 음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천하게 여겼으며 그런 사람을 利에 따른 자라고 좋지 않게 말하였지만 어찌 먹는 것을 폐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라는 말로 그 변명을 글의 서문에 덧붙였다.

더욱이 조선중기 이후 사림들이 정권을 쥐면서 그 이전의 詞章的인 글쓰기가 사라진 탓에 단지 인간의 동물적인 성품만을 강조하는 음식에 대한 글을 그들이 남겼을 리 없다. 그래서 조선후기 실학자들마저 백성들을 배불리는 일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지만, 허균처럼 산해진미의 진면목을 밝히는 글을 당당하게 쓰지는 못했다. 단지 이수광이나 이익, 그리고 이규경 정도를 빼고 나면 거의 없는 편이다.

단지 음식을 빗대어 자신의 신세나 세상의 이치를 읊조린 경우는 있었다. 가령 정조 때 선비 윤영희는 “아침에는 이웃에서 양식을 구걸하지 않고, 土飯과 塵羹을 가지고 즐거움을 부치었네”라는 시를 남겼다. 그런데 자신의 신세를 빗대어 읊조린 이 시에서 우리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생각했던 가장 최소한의 밥상차림이 바로 ‘飯’과 ‘羹’임을 알아차린다. 사실 반과 갱은 고대 중국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밥상차림이었다. 그러나 송나라 이후 중국인들은 ‘飯羹’을 밥상의 기본으로 여기지 않고 그 대신에 밥과 요리로 구성된 ‘飯菜’를 밥상의 기본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반갱’을 밥상의 기본으로 생각한다. 더욱이 조선후기에 온전하게 자리를 잡는 왕실과 양반, 심지어 서민의 일상적인 밥상 구조인 3첩·5첩·7첩·9첩·11첩 반상의 기본에는 沈菜(김치)와 醬이 보태어지지만, 여전히 ‘반갱’이 핵심적인 음식이다. 이 모두 고대 중국의 유토피아였던 요순시대를 현실로 만들어 보려고 했던 조선시대 선비들의 尙古的인 이상론이 반영된 결과라고 하면 너무 억지인가.

그러나 일상의 밥상은 물론이고 심지어 죽은 조상에게 바치는 제사상에도 ‘반갱’이 중심에 놓인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조선시대 선비들의 음식은 비록 그 내용은 요순시대를 닮지 않았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원리는 尙古에 있었음을 확인한다. 선비들의 부인이 적은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과 ‘규합총서’ 같은 책이 전해지지만, 이 책 역시 奉祭祀와 接賓客을 으뜸 일로 여겼던 종부들의 인식 속에서 나왔다. 특히 쌀밥은 조상을 상징할 정도로 중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곡물로 지은 밥을 많이 먹기 위해 반찬들이 짜고 매워졌다. 결국 선비들의 검약함과 상업천시는 外食을 발달치 못하게 했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조선음식은 본격적인 변신을 하기 시작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