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3:00 (토)
"무뇌아적 텍스트주의와 현학적 겉멋들기"
"무뇌아적 텍스트주의와 현학적 겉멋들기"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07.05 00: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쟁점 : 평론가 최강민, 서영채․손정수․김형중 비판하다

 

 

 

 

 

 

 

 

 

 

 

교수신문을 통해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의 소설비평이 ‘평가’를 유보함으로써 주례사비평으로 치달았다고 비판한 문학평론가 최강민 씨가 이번에는 김윤식 교수의 직계자제인 손정수 계명대 교수(문학평론가), 방계제자인 서영채 한신대 교수(문학평론가)를 향해 강한 비판을 제기해 주목을 끈다. 최 씨는 최근 나온 반년간지 ‘작가와 비평’ 제3호에 실린 ‘세기초 문학주의의 파탄과 비평의 위기’라는 글에서 서영채, 손정수, 김형중을 비평을 '말아먹는' 대표적 사례로 거론하면서 실명비판을 가했다.

▲손정수 계명대 교수 ©
최 씨는 손 교수가 “서구콤플렉스와 새것콤플렉스에 중독된 중증환자”라고 포문을 연다. 손 교수가 최근 은희경의 장편 ‘비밀과 거짓말’에 대해 쓴 ‘리토르넬로, 혹은 생을 형성하는 리듬에 대한 사유’라는 평론을 문제 삼는다. 최 씨는 손 교수가 들뢰즈에게서 가져온 리토르넬로라는 개념을 ‘반복되는 리듬’이라는 의미로만 파악하고 작품에 적용하고 있으면서 굳이 그 개념을 현란하게 설명하고, 제목으로까지 뽑아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손정수는 리듬이라고 붙이면 될 것을 굳이 리토르넬로라는 낯선 외래어를 사용했을까. 그것은 인용의 수사학이 빚어내는 현학주의다”라고 판단을 내린다. 또한 이 평문은 서구이론과 비평적 해석이 기계적으로 결합돼 주례사비평을 낳고 있다고 말한다. 최 씨에 따르면 은희경의 이번 장편은 뻔한 오이디푸스 서사, 형제애를 강조한 낯익은 가부장제주의, 피상적인 작중인물, 복고취향의 감상성으로 미학적 파탄에 이른 작품이지만, 손정수는 이런 함량미달을 칭찬하기 위해 서구이론을 전면배치해서 소설의 중층적 성격을 강조하고 미학적 결함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최 씨의 비판은 손 교수의 평론이 ‘리포트형 비평으로 추락’했다는 것으로 계속 이어진다. 그 원인은 서열주의, 보신주의, 패거리주의에 물들어 비평적 자의식이 실종되면서 나왔다는 것. 자의식의 실종은 흔히 텍스트에 대한 과잉해석이나 무기력한 종속을 불러온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최 씨는 “모르면 모르는 수준에서 알면 아는 수준에서 자신의 감각과 이론적 수준으로 감행해야 할 비평이 아직 습득과정 중인 그래서 제 자신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개념의 번다한 나열과 조합으로 이뤄진다”는 문학평론가 故 이성욱 씨의 말을 인용하면서 손 교수의 비평정신의 실종을 통박한다. 최 씨는 이뿐만 아니라 “손정수의 주례사비평은 은희경의 ‘비밀과 거짓말’을 자신의 서울대 선배인 류보선이 해설의 형식으로 극찬했다는 주변환경을 치밀하게 고려해서 나온 것이다”라는 혐의도 두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형중. '문예중앙' 편집주간. ©

손정수 교수와 함께 도마에 오른 또 하나의 “겉멋 들린 소장평론가”는 문학평론가 김형중 씨다. 최 씨에 따르면 김형중은 ‘문예중앙’의 편집주간을 하면서 여러 좌담이나 글을 통해 평단에 독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최 씨는 “새로운 이론을 하나 배워오면 곧바로 작품에 적용해서 이 이론이 작품 분석에 얼마나 적절한가를 보여주는 선에서 머무는 현학적인 평론”이란 구절을 인용한다. 이것은 좌담 ‘뉴미디어 시대 문학의 새로운 지형을 말한다’에서 김형중이 한 말이다. 그러나 최 씨는 이 말에서 자기모순에 빠진 김형중의 곤궁한 처지를 떠올린다. 김형중이야말로 ‘소설의 제국주의, 미친, 새로운 소설들에 대한 사례보고’에서 “겨우 3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에 댄디, 오스카 와일드, 벤야민, 아도르노, 마르셀 뒤샹, 미소니즘, 프로이트, 부르조아 모더니티, 운하임리히, 엘리트주의, 메커니즘 등 서구에서 가져온 외래어와 이론으로 온통 도배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꼭 필요하다면 상관없지만 이 글은 “불필요한 현학성과 그것을 통해 새로움에 도달했다는 착각의 망령”이 지배하고 있다고 최 씨는 판단한다. 그는 김형중에게 “평론을 교시하듯 독자에게 던져주면서 자신의 글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재미라는 말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 “나르시시즘적 도취에 빠져 자신만 오르가즘을 느끼는 언어의 자위행위”라고 비판한다.

 

▲서영채 한신대 교수. ©

최 씨는 이런 비평계의 “폐단”의 원인이 1990년대 중반 이후 ‘문학과사회’, ‘문학동네’가 주창해온 ‘문학주의’에 있다고 분석한다. 그는 특히 정과리와 서영채의 평론을 거론하면서 문학주의가 어떻게 “대상텍스트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는 무뇌아적 텍스트주의로 변질”되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평가란 텍스트가 지닌 의미에 대한 논의가 쌓여가면서 아주 천천히 이뤄지는 것"이라는 서영채의 비평관에 대해서 딴지를 건다. "작품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는 일이, 작품의 외재적 가치의 포기와 내재적 가치에 일방적으로 순응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 작품에 대해 평가를 유보하는 것은 오히려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데 방해가 되며, 80년대의 계몽주의적 비평이 문제가 됐던 것은 하나의 잣대로 작품을 평가해서였지, 평가행위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최 씨의 생각이다. 황석영의 ‘심청’, 김영하의 ‘검은 꽃’, 천명관의 ‘고래’를 평한 서영채의 평론이 오리무중이거나 작품의 내재적 가치를 찬양한 주례사비평으로 귀결되는 것은 평가행위를 포기한 비평이 다다른 종착지를 보여준다고 최 씨는 말한다. 작품의 다원적 가치를 존중한다는 핑계로 함량미달의 작품을 감각적 언어로 상찬하고, 그런 무차별적인 텍스트에 대한 존중은 독자의 불신을 가속화시킨다고 공박하기도 했다. 이런 꽈배기식 비평언어의 번창은 난해한 장인적 비평 글쓰기(?)로 제도화되면서 수많은 모방자들을 양산했으며 독자들을 문학판에서 내쫓아버리고 문학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최 씨는 결론을 내린다.

최강민 씨의 이번 비판은 강단비평이 현장비평(저널리즘 비평)을 장악하고, 논문을 양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는 관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비평가로서의 자의식보다는 서구이론을 맹신하는 식민지적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하면서, 독자에게는 그 모호함과 현란함으로 거의 ‘고문’에 가까운 수준의 모호한 텍스트를 안겨주는 불성실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문학의 위기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그의 판단은 다소 단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으로 여겨진다. 원로 문학평론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비평의 전문성에 대해 "비전문가적 전문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비평이 전문가적 식견의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그 전달방식은 비전문가들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써야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작품을 풍부하고 정직하게 느끼려고 애를 쓰고 느낀만큼 정확하게 글을 쓰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제이 2015-09-23 01:52:42
교수라고 했다가 이름으로 부르는 점에서 호칭에 일관성이 없네요. 서열주의, 보신주의, 패거리주의라고 확장 해석한 근거는 뭡니까? 그리고 '모르면 모르는 수준에서'라는 부분을 인용한 점에서 이미 '모른다'는 전제가 들어있네요. 쉽게 말하면 모르면서 왜 썼냐고 비판하는 거 아닙니까? 헌데 상대가 모른다고 전제한 것도 비약 아닙니까. 리토르넬로 중에서도 반복되는 리듬에 주목했을 수도 있고 그게 개인의 감상인데 그 용어썼다고 '그걸 모르면서 왜썼냐'고 비판하는 건 비판이 아니라 비난인데요. 비난은 무작정 깎아내리는 거니까요. 그냥 까고 싶었던 거 아닌지.. 참 어이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