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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학본체론
인학본체론
  • 이지원
  • 승인 2021.09.30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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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라이 지음 | 이원석 옮김 | 글항아리 | 744쪽

유가의 다양한 학설을 ‘인仁’의 철학으로 정립한

천라이 칭화대 교수의 역저

『중화독서보』 2014년 ‘10대 도서’로 선정된 명저

이 책은 천라이(1952~ )가 2014년에 펴낸 『인학본체론』을 국역한 것이다. 천 교수는 중국 칭화대 철학과 교수이자 칭화대 국학연구원장으로서 당대의 대표적 중국철학 연구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주희철학연구』(1988)와 『주자서신편년고증』(1989)을 통해 주자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이런 업적이 국가교육위원회의 인정을 받아 “특별 공헌 철학박사학위 획득자”의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1998년에는 ‘세기횡단형 인재’로 선정되었다.

그의 저서는 우리나라에도 여러 권 소개되었다. 방금 언급한 그의 대표작인 『주희철학연구』는 『주희의 철학』(예문서원, 2002)으로 출간되었고, 『송명 이학』(1992)은 『송명 성리학』(예문서원, 1997)으로 한국의 독자를 찾았다. 『있음과 없음의 한계: 왕양명 철학의 정신』(1991)은 『양명철학』(예문서원, 2003)으로, 『고대 사상문화의 세계』(2002)는 『중국 고대 사상문화의 세계』(성균관대출판부, 2008)로, 『공자와 현대 사회』(2011)는 『진래 교수의 유학과 현대사회』(예문서원, 2016)로 각각 출간되었다. 이 책 『인학본체론』은 중국 광밍일보사와 중국출판인협회가 발간하는 『중화독서보』에서 ‘2014년 10대 도서’로 선정된 명저다.

천라이에 따르면 『인학본체론』은 리쩌허우(1930~)의 두 저서 즉 『중국철학이 등장할 때가 되었는가?』(2013)와 『중국철학은 어떻게 등장할 것인가?』(2015)에 자극을 받아 저술되었다. 리쩌허우가 ‘정감본체론’으로 중국철학의 핵심을 파악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천라이의 ‘인학본체론’이라는 서명이 그것을 의식하여 지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리쩌허우는 탈현대가 데리다 Jacques Derrida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했으므로 이제 중국철학이 세계무대에 등장할 때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그의 발언 이면에는 탈현대 사상 혹은 그 철학의 주요 논점을 중국의 전통철학이 이미 선취했다는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정감본체론’을 통해 탈현대 사상과 중국 전통 철학을 회통시킴으로써, 단숨에 후자를 세계 철학의 한 주역으로 데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정감본체론은, 간단히 말해 인간 이성이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 아니며, 그것은 인간 유기체의 지각 체계의 특수한 발전 양상에 해당되므로, 인간의 정감, 즉 감성에 철학적 사유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삼는다. 그렇다고 해서 정감본체론이 이성의 전면적 부정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며, 다만 이성을 감성의 특수 양태로 보아야 한다는 데에서 그친다.

천라이 교수는 리쩌허우의 이런 입론이 궁극적으로 생물학적 사유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철학 특히 중국 전통 철학을 생물학으로 해소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다. 그렇다면 천라이는 이성만을 인간과 세계의 본질로 보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그의 스승 펑유란에 대한 평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펑유란은 초기에 신실재론을 받아들여 이를 실체적 존재로 여겼다가, 후기에는 도가의 유기체적 세계관을 받아들여 이른바 ‘대전설’을 펼쳤는데, 천 교수는 이 두 가지 학설을 통합할 수 있는 체계를 정립하고자 한다. 펑유란식 용어로 표현하자면 신실재론과 실용주의의 통합을 시도하는 셈이다.

천라이는 이를 위해 슝스리(1885~1968)와 하이데거(1889~1976)의 철학에 주목한다. 슝스리는 본체와 작용의 불가분리를 주장하는 유기체적·일원론적 세계관을 지향했다. 한편, 하이데거는 “진리는 스스로 드러나면서 동시에 스스로 숨는다”라고 함으로써 현실 내 존재의 총체를 진리로 여긴 바 있다. 이러한 하이데거와 슝스리 사이에 형성된 존재론 상의 유사점에 바탕을 두고 천라이는 본체 위주의 신실재론과 작용 위주의 실용주의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것이다.

천라이는 슝스리의 ‘본체’ 자리와 하이데거의 ‘진리’ 자리에 인仁을 갖다 놓는다. 그래서 천 교수에게 ‘인’이란 끊임없이 작용하되 저 자신의 동일성을 영원히 상실하지 않는 유기적 전체이자 각 작용 내에 편재하는 보편적 존재로 자리매김 된다. 그에 따르면, 고대에 ‘인’은 단지 ‘이웃 사랑’ 정도의 소극적 의미만 띠었으나, 후대로 가면서 ‘만물일체’를 가능케 하는 원리이자 ‘만물일체’ 그 자체라는 점이 부각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은 초월적 실재이자 유기적 전체이므로 ‘인’에서 본 체와 작용은 통일된다. 천 교수에 따르면 유가철학사는 ‘인’의 자기 개현의 역사이며, 유가적 깨달음은 개인에 ‘의한’ 인의 깨달음이 아니라 반대로 ‘인’이 인간 개체 속에서 스스로 발현해나가는 과정이다. 헤겔의 정신 철학을 연상시키는 장대한 구도라 아니할 수 없다.

천라이의 이런 입론은 단지 주장만 나열해서는 성립되지 않으므로 그는 중국의 전통 유가 철학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그 논거를 상세하게 제시했다. 여러 논거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주희 철학의 존재론에 관한 그의 새로운 해석이다. 그에 따르면, 주희는 만년에 이르러 이理와 기氣를 뛰어넘으면서 그 양자를 포괄하는 본체, 즉 ‘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했고, 이런 사유는 명대의 왕수인에 의해 정점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주자학을 ‘이학’으로, 양명학을 ‘심학’으로 호명하면서 그 두 가지를 대립시키는 것은 사태의 일면적 관찰에 불과한 것이다. 실상은 ‘인’이라는 본체가 송대에서 명대를 거쳐 가면서 자신을 개현해 왔는데, 그 개현 양상에 따라 각각 ‘이학’ 또는 ‘심학’이라고 불렸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천라이에게서 ‘인’이라는 본체는 영원히 변치 않고 존재하면서 동시에 시대에 따라 달리 발현하는 실재다. 그것은 당연히 현대에도 존재한다. 그에 따르면, 인애, 자유, 평등, 공정, 화해의 다섯 가지 가치가 그 발현물에 해당된다. 그는 이 다섯 가지 가치를 중심으로 중국의 시민사회적 덕목을 구성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이들 가치 중 인애가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상이 이 책의 대체적 흐름이다. 저자가 제시한 논지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서구 근대의 비합리주의 계열 철학으로 유가 철학을 재해석했던 시도는 이미 20세기 중후반 타이완·홍콩 등의 이른바 현대 신유가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평가가 있을 수 있겠다. 또한, 존재론적 관점에서 리쩌허우의 입론과 천라이의 그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던질 법하다.

그렇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관념론적이라 하여 비판받았을 현대 신유가적 사유의 한 갈래가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에 의해서 비판적으로 수용되고, 더 나아가 향후 중국을 인도할 정치·사회적 가치의 근거로서 재조명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더구나, ‘생활유학’ ‘제도유학’ 등 유학의 철학적 요소를 제거하고 그 윤리와 제도만을 실용적으로 섭취하려는 흐름이 중국의 민·관 양측에서 형성되는 이 시점에서 유학의 철학성을 대담하게 제창하는 저자의 기백과 통찰은, 일견 전일적으로 보이는 현대 중국 사상계의 이면으로부터 역동성이 다양하게 분출될 가능성을 적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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