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보면 이 결정은 결코 잘 된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를 전공한 필자가 편집소위원회 위원장이 된다는 일 자체가 순서가 아니다. 지금도 이해가 안가는 일이 김동길 박사가 소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그렇게 극구 사양한 이유다. 또 후에 안 일이지만, 편집회의에서 분명히 의사를 표시한 안 박사가 그렇다면 본인이 소위원회를 맡겠다고 나서지 않았는지 모두가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다. 말이 소위원회 위원장이지 ‘씨?의 소리’지의 출판 자체에 대한 전 책임을 지는 자리였다. 우선 잡지 발행에 필요한 재원이 전무한 상태였다. 병석에 누워계신 선생님께 재정 문제를 의논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다가 모금 문제가 화제에 올랐는데 선생님께서 '내게 돈이 좀 있다'고 하시면서 인편을 통해 일천만원을 보내셨다. 그때의 형편이 선생님의 쌍문동 자택의 차고로 마련되어 있는 지하 공간을 사무실로 사용할까 생각해 보았으나 여의치 않았고, 원효로 4가 70번지의 선생님 댁도 사용할 형편이 못되었다. 결국 찾다보니 회현동에 임대 사무실을 빌릴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서 마련한 사무실이 중구 회현동 2가 49-4 번지에 위치하는 7평 정도의 사무실이다. 그리고 복간호를 내니 재정이 바닥났다. 민망한 이야기지만 평생을 살아오면서 예금통장에 돈을 여축하면서 살아본 기억이 없는 내가 어쩌자고 겁도 없이 그런 직책을 맡았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안 간다.
내가 거의 20년 전의 일에 대하여 이렇게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은 새삼 누구를 원망코져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나보고 ‘씨?의 소리’지의 복간을 귀뜸 해주신 후 반 년 이상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복간을 위한 편집회의가 소집된 것은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만 그저 아무 일 없이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풍문으로 또는 이런저런 경로를 통하여 들리는 소리에 따르면, 이제는 시대의 선구자로 높이 칭송을 받으시는-이미 고인이 되신- 기독교계의 원로시인이 함 선생님께 ‘씨?의 소리’지를 당신에게 넘겨 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고, 이미 언급했지만 안병무박사와 함 선생님 사이에서 잡지 복간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이견이 오갔다는 이야기도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함 선생님은 이런 경우에는 그가 우리에게 남겨 준 유언과도 같은 예의 ‘기다림의 철학’으로 임하셨으리라 추측된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묵묵히 기다리셨던 것이 아닐까? 소위 복간호에 실린 선생님의 말씀대로 “이미 이겨놓고 싸우는 싸움”을 선생님은 택하신 것 아닐까?
선생님께서 여러 번 말씀해 주신 맹자의 ‘告子章句’(下)에 있는 말씀을 상기하면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하늘이 장차 대임을 이들에게 내리려 하시니 반드시 먼저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고 그들의 살과 뼈를 지치게 만들며 그들의 배를 굶주리게 하고 그들의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는 일이 뜻과 같지 않게 만든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분발하고 그 성질나는 것을 참게 하여 자기가 해내지 못하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에야 능히 고칠 수가 있으며 마음 속에서 번민을 하고 생각을 두루 깊게 하고 난 뒤에야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번민하는 것이 얼굴빛과 목소리에 나타날 정도까지 괴로움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마음속으로부터 도리를 깨닫게 된다. 안으로는 법도를 잘 지키는 世家와 보필하는 현자가 없으며 밖으로는 적국과 외환이 없다면 그 나라는 언제나 망하게 된다. 그런 뒤에야 우환 속에서는 살 수가 있고 안락한 속에서는 망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여러 번 노자 모임에서 그리고 개인적인 담론의 자리에서 수없이 풀이해주신 이 맹자의 말씀을 나는 지금 다시 한번 되뇌면서 나의 오늘을 감사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는 내 밑에서 석사학위 내지는 박사학위를 끝내고 취직해있는 제자들에게까지도 매달 십 만원씩 거출하라는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이렇게 이 글을 쓰고 있노라니 당시에 보이게 안보이게 생각지도 않게 적지않은 금액을 때때로 보내주신 몇몇 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 자리에서 일일이 거명은 안하겠지만 지금도 그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스며오는 고마움을 금할 수가 없다. 복간을 위한 편집회의에서 나를 소위원회 위원장으로 밀어주신 몇몇 분들에게서는 별다른 도움을 받은 기억이 없는 것은 어쩌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때마침 全 정권 하에서 해직되었던 기간의 보상이라 하여 고려대학교에서 뜻밖으로 지급해준 보상금은 그야말로 삼복더위의 가뭄을 해갈해주는 소나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소나기’에 불과했다.
이런 와중에서 복간호(1988년 12월호 통권 96호)는 여러분들의 축복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은 우리들 깃발을 내려서는 안되리,/ 하나씩의 햇덩어리 가슴 깊이 품고,/ 함성하여 전진하며/ 휘날려야 하리.
눈물이 그 피가 되고,/ 뼈가 살, 살이 뼈로 짓이겨진 강산,/ 너무 오래 너무 많이 짓밟혀 온 살음,/ 땅에서는 가장 값진 우리들의 진리/ 자유 그 목숨보다 더 한 것을 위한,/ 이대로는 우리 싸움 멈춰서는 안되리,/
사람다운 사람삶의 가장 처음 바탕,/ 생명존중, 인권존중, 평등, 평화, 균등의/ 사람삶이 일체 가치의/ 골고른 누림을 위하여,/
속지말고 늦추지 말고 끝날 끝까지,/ 반 자유 반 민주의 악의 뿌럭지,/ 캐고 캐고 치고 쳐서 근멸 될 때까지,/ 무한혁명 무한승리 우리들의 깃발,/ 함성하며 전진하며 휘날려야 하리./>
이미 소개한 바 있지만 게오르규가 말한 잠수함 통로 복판에서 사육되고 있는 토끼의 역할을 고고하게 지켜 나가신 故 박두진 시인의 ‘복간 기념시’는 그때의 고독한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평균 200페이지 전후의 그야말로 소박한 잡지지만 월간이라는 사실은 봉급이래야 형식 뿐이긴 하지만 유급직원 한 둘 가지고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고역이었다. 도리 없이 편집소위원회에는 1월 12일 모임에서 복지 후원회의 필요성을 의논하고 ‘씨?의 소리’ 후원회 발족을 위한 준비위원장으로 장기려 박사님을 위촉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래서 소위원회 위원이신 김경재 교수님과 같이 부산에 내려가 장기려 박사님을 직접 찾아 뵙고 재정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말씀드린 다음 후원회 준비위원장이 되어 주실 것을 간곡하게 말씀드렸다. 장기려 박사님은 조금도 주저하시는 기색없이 준비위원장직을 수락하시며 그 자리에서 1천 5백만원이라는 거금을 곧 송금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나는 그날의 감격을 지금껏 잊지 못하고 있다.
1987년 7월 13일 장장 네 시간에 걸친 수술을 마치신 다음날 집도의가 선생님 병실을 회진할 때, 간병하던 사람들이 집도의에게 간밤에 선생님께서 통 잠을 못 주무셨다고 말하자 선생님께서 직접 “수술한 곳이 아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아파서 잠 이루지 못했으니 걱정 마시오”라고 답변하셨다는 함 선생님의 병세는 그렇게 기다리시던 복간호를 알아보지 못하실 정도로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