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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퇴행인가 아니면 토착화를 위한 고민인가?”
“학문의 퇴행인가 아니면 토착화를 위한 고민인가?”
  • 박병현 부산대
  • 승인 2005.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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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 『사회복지정책론: 아름다운 세상가꾸기』 박승희 지음| 성균관대출판부 刊| 486쪽| 2005

국가의 개입을 당연시하는 사회복지라는 학문을 가족주의와 공동체주의를 주된 문화로 간직하고 있는 한국에서 연구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국가개입을 강조하자니 가족주의나 공동체 의식을 소홀히 하는 것 같고, 가족이 해체되고 공동체가 무너지는 현실에서 마냥 사회복지를 가족이나 공동체에 맡기자고 주장하는 것은 사회복지학자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래서 한국에서 사회복지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가족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에서 고민한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렇다.

가족주의와 공동체주의를 강조하는 유학을 건학이념으로 하는 성균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박승희 교수는 “풍요롭고 복지제도가 완비되어 가정도우미들의 도움을 받지만 외로운 노인들이 사는 사회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난하여 복지제도는 미흡하지만 손자의 재롱을 보며 사는 행복한 노인들이 사는 사회를 선택할 것인가?”를 자문하면서, 유학 속에 둘러싸인 환경 속의 사회학자 박승희에서 어느 순간 외부환경의 강요에 의해서건 아니면 내면의 필요에 의해서건 인간생활에의 국가개입을 강조해야만 하는 사회복지정책학자 박승희로 전환하면서 가지게 되는 고민을 이 책에서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박승희 교수는 ‘사회복지학문의 퇴행’을 계속하겠다는 언급으로 이 고민의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박 교수는 ‘사회복지정책론’이라는 제목의 책들이 지니는 전통적인 형식과는 달리 책의 상당 부분을 사회복지욕구, 가족복지정책과 노인복지정책에 할애하면서 가족주의에 입각한 한국의 사회복지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박승희 교수는 국가주의와 가족주의 사이의 학자적 고민만을 보여주었을 뿐, 가족주의에 근거한 한국사회복지정책의 새로운 방향을 뚜렷하게 제시하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기본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물질적 부양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의 공급은 국가가 소득보장 방식으로 최종책임을 지고, 서비스 공급은 가족과 국가가 분담하며, 심리적인 부양 중에서 敬愛는 주로 가족이 하되 국가가 보조해 주자고 제안함으로써 국가와 가족이 노인부양에 대한 바람직한 업무 분담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현재의 한국 사회복지정책에서 이러한 면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제안은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 우리보다 매우 낮은 지극히 개인주의적 사회인 미국에서도 ‘공공이 지원하되 민간이 책임진다’라는 논리로 시행되고 있다. 따라서 박 교수의 주장은 보다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박 교수는 대다수의 사회복지정책학자들이 소홀히 하고 있는 한국의 전통문화인 공동체주의에 근거해 한국사회복지정책의 내용이 결정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동양사상에서 공동체주의란 서양의 자유주의사상과 대립이 되는 것으로 이상적인 공동체의 실현에 가치를 두는 사회관과 윤리관을 말한다. ‘禮記’, ‘禮運’ 편에 나오는 大同사회, ‘論語’, ‘里仁’ 편에 나오는 어진마을, ‘孟子’, ‘등문공’ 편에 나오는 정전제에 기초한 촌락공동체가 바로 유가에서 이상으로 여겨왔던 사회모델이다. 공자는 “출신에 관계없이 교육의 혜택이 베풀어져야 한며”(有敎無類),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보다 부의 균등한 분배가 더 중요하다”(不患貧患不均)고 했다. 맹자도 “기본적인 삶의 수단이 있은 후에야 도덕범절을 가르칠 수 있다”(孟子, 등문공 上)고 말한다. 이는 개인이 사회적으로 배제되어서는 안되며, 모든 개인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지니고 있음으로 보여준다. 즉, 개인의 최저한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기본적인 복지환경을 유학의 공동체주의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주의라는 전통문화에서 사회복지정책의 방향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과거를 자꾸만 되돌아보고 싶어 하는 박 교수의 ‘학문적 퇴행’이 한국사회복지정책의 ‘토착화를 위한 고민’으로 승화되어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아마 박 교수가 책을 쓰면서 어디엔가 반드시 기술하고 싶었던(결국엔 책의 말미에 기술했지만) “사회복지 없는 孝는 (殺人이고, 孝없는 사회복지는 飼育이다”라는 귀절에서 한국 사회복지 토착화의 서막과 동아시아적 사회복지의 앞날을 미리 볼 수 있다. 그러한 면을 보는 것은 같은 학문적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내게는 즐거움이다.

박병현 / 부산대 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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