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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과 김수영
미당과 김수영
  • 이필렬 / 서평위원·방송대
  • 승인 2001.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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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수상]

내 책장에는 서정주의 ‘떠돌이의 시’와 김수영의 시전집이 꽂혀 있다. 서정주의 시집은 1976년에 산 것이다. 그의 시들은 당시에 1년 쯤 암송하듯 읽다가 덮어버린 후에는 한번도 다시 들쳐본 적이 없다. 김수영의 전집은 80년대에 산 것이지만 ‘떠돌이의 시’보다 몇 달 쯤 뒤에 구입한 ‘거대한 뿌리’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니 나는 서정주와 김수영의 시를 거의 같은 시기에 읽기 시작한 셈이다. 당시에 서정주의 시는 그야말로 재미를 담뿍 맛보며 읽었고, 김수영의 시는 고생고생 어렵사리 읽었다. 그러나 서정주의 재미는 1년밖에 안갔다. 김수영은 내가 80년대 말 독일에서 밤늦게까지 화학실험 할 때도 잊지 못했다.

서정주의 시와 1년만에 결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77년 KIST에서 열린 과학과 문학(화?)이라는 심포지엄에서 서정주의의 ‘당찬’ 주장을 듣고서였다. 그는 문학측의 대표로 나와서 발표 서두를 “과학은 문학보다 저급한 것이다”라는 말로 장식했는데, 그의 말을 잔뜩 기대하고 있던 나에게 이 말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가톨릭의대 맹광호 교수가 반박했을 때에도 서정주는 “나는 과학이 문학보다 저급하다고 본다”가 아니라 “과학은 문학보다 저급하다”는 명제적 성격의 답을 되풀이했는데, 이러한 어법에 대한 실망이 그의 시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던 것 같다.

요즈음 고은선생이 ‘창작과비평’에 쓴 글로 촉발된 서정주 논쟁이 한창이다. 논쟁의 주안점은 서정주의 시와 삶의 연관성 문제이다. 나는 77년 심포지엄의 발언이 서정주의 시와 삶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자신의 세계만이 존재했던 것이 아닐까. 영원성이 깃든 듯, 그렇기 때문에 변화가 없는 무속적·설화적 시의 세계, 그것이 그가 진정으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그밖의 것은 모두 저급한 것,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전두환이나 일본에 좀 아부한들 무슨 상관이랴. 그렇다면 그가 왜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이 될 수밖에 없는지 이해되지 않을까. 그의 정신세계는 다른 세계와의 교류가 없는 닫힌 세계였다. 그에게 최고의 미란 자신의 닫힌 정신세계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으리라.

‘떠돌이의 시’와 김수영 시전집을 다시 뽑아 읽는다. 서정주의 시는 아직도 읽는 재미는 조금 있지만 감흥은 없다. 그러나 김수영의 시는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가슴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이렇게 나는 바다에서 뺏거나 훔친 것이 아니라/늘 항상 은근히 얻으며 살아 왔으니/ 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런 서정주의 자연과 동무하고 자못 해탈한 듯한 시구보다 김수영의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에서 나는 진정한 감동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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